<왼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여자> 1917년. 과슈, 수채, 검정초크 46.5×29.7cm 프라하 국립미술관
쇼맨십에 잘난 체, 멋내기에 관심이 많았던 실레는 자존심이 상했다. 한편으론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근엄한 모습은 이미 발명된 사진기에 얼마든지 넣을 수 있는데 왜 그토록 껍데기에 치중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물며 스승 클림트도 ‘사진의 세상’과 ‘회화’를 별개의 시각으로 보지 않았던가 말이다. 하지만 그건 실레의 생각이었다. 19세기말 시대적 관점에서 그의 그림은 평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인물이든 풍경이든 온통 비틀린 선들과 굴곡진 면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친절한 배경설명도 거의 하지 않았다. 클림트의 그림 중 가장 에로틱하다고 할 수 있는 <다나에>에서처럼 우아한 미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이렇다보니 기껏해야 들라쿠르와나 앵그르 작품을 에로틱한 것으로 느꼈거나 누드란 반드시 신화 속에 존재하는 요정과 같아야 한다는 관념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겐 그의 그림들로부터 ‘상식적인 수위’를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실레의 작품에 나타나는 에로티시즘은 남녀 간의 사랑이나 관능적 사랑의 이미지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암시하는 경향을 넘어선다. 차라리 대단히 노골적이며 이상화되어 있다는 게 맞다. 근 100년이 흐른 오늘날 관점에서 보아도 그의 작품들은 분명 적나라함이 배어있다. 자위를 하는 소녀가 있는가하면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옮겨놓은 것도 있다. 심지어 레즈비언처럼 동성의 누드가 한 화면에 포개진 작품들도 있다. 이 정도면 논란의 대상임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그는 빈에서 벗어나 두 번째 거처로 삼은 노일렝바흐 주민들로부터 어린 소녀들을 유혹하고 유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해 24일 간의 구금에 처해진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미술작품을 놓고 성기의 크기가 크면 외설이고 작으면 예술이라는 법적인 잣대를 적용하고, <여고생 시리즈> 작가 김경태 씨처럼 전시도중 경찰서에 끌려가는 나라였다면 그는 고작 3주 남짓한 구금생활보다 훨씬 더한 곤욕을 치렀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이 사건 덕분에 졸지에 박해 받는 예술가로 대서특필되면서 뜨는 작가가 되어 빈으로 금의환향 한다.)
에곤 실레 자신 스스로가 성화라고까지 추켜세운 그의 작품들에 내재된 에로티시즘은 다양한 배경아래 출발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정신적 지향점이 성애의 표현에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곧 불안정한 자아와 신경질적인 내면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는 점이다. 자아의식은 수많은 자화상을 낳았고 이는 자크 라캉의 거울단계에서처럼 순차적인 수순을 밟는다. 여기에 세기말 혼돈과 초기 경제적 궁핍함이 이를 더욱 부채질했으며 어딘가 모르게 억압당한 성욕(리비도:Libido: 프로이트의 리비도에 관한 주장은 실레의 에로티시즘을 상징하는 데 가장 적절하다.
그는 성욕이 충족되기를 바라다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불안으로 변하며 또한 리비도는 정신활동의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처음엔 리비도를 자기보존 본능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으나 나중에는 이 둘을 결합, 에로스라고 하여 삶을 파괴하려는 본능과 대립시켰다. 많은 구절에서 실레의 정신성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을 풀어내듯 히스테리 한 그의 성격(그가 반 고흐나 에두바르트 뭉크를 왜 좋아했는지 살짝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이 한 몫 하면서 그림들은 온통 앙상한 비틀림으로 점철된다.
두 번째로 시선이 머무는 것은 왜 그토록 일그러진 선들이 난무하는 그림을 그렸는가에 있다. 베이컨처럼 아예 아카데미근처엔 가보지도 못한 것도 아니건만 그가 쏟아 놓은 화면엔 마치 정규교육 한 번 제대로 받지 않은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넘실거리는 선들뿐이다. 그러나 대답은 의외로 쉽다. 실레는 몸의 언어를 화면에 옮겼던 것이다. 그가 만나 교우한 사람들 중엔 팬터마임을 하거나 무용수도 여럿 있었다. 실레는 ‘루스 생드니’라든가 ‘이사도라 던컨’ ‘로이풀러’와 같은 무용수들로부터 큰 자극을 받아 신체로서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풍부한 감정들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림 속으로 전이된 뒤틀림과 과장된 율동은 실레의 그림에 화려한 선의 감각으로 피어났으며 이때부터를 클림트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본다.
그는 일부러라도 에로틱한 분위기기를 연출하려 했다. 스타킹을 반쯤 올리거나 스커트 속으로 은밀하게 드러난 음부 따위를 그렸다. 일그러지고 무표정한 사람들의 손은 은밀한 곳을 감싸거나 가리키고 있었고 아래에서 포커스를 잡아 신체의 중요부위를 부각시킨 작품들을 선보였다. 음부에는 붉은 선홍색을 썼고 대비되는 푸른색을 주변에 병합시킴으로서 관음의 의도를 높였다. 더구나 인체를 제외한 여백 충만한 공간은 그와 같은 ‘의도’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실레의 그림을 보면서 선정적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즉 에로티시즘의 관점에서 볼 땐 대단히 직설적이지만 수치심을 유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물론 한때 빈 법원은 그의 작품들을 ‘포르노’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를 어원으로 하는 에로티시즘은 20세기에 들어서기까지 종교와 금기로부터 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포르노그래피와 에로티시즘의 경계는 늘 사회의 변화에 따라 수정되고 변화되는데, 실레는 유럽미술사에 있어 그 개념의 첫차에 동승했고 그만큼 다양한 화두를 던졌다. 또한 28살이라는 짧은 생애가 말해주듯 그는 그것을 매우 열정적으로 소화했다.
다만 궁금한 것은 과연 '실레와 모델 간의 관계는 어느 정도였을까'이다. 그의 스승 클림트는 ‘진실한 그림’을 위해 모델과의 성행위도 서슴없었고 로댕과 같은 거장들도 ‘예의’로서 깊은 관계를 맺곤 했다. 그러나 실레의 자료에는 그런 부분에서 지나칠 만큼 ‘건전’하다. 스타의식이 좀 있었다는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동생 게르티 실레의 옷을 벗겨가며 그림을 그릴 정도로 성에 탐닉했던 점, 당시 사회가 ‘소아성애증’조차 묵인했고 실제로도 실레는 어린 소녀들을 많이 그렸다는 점, 자위를 하는 여성을 눈앞에 두고도 맹순 맞게 앉아 있기에는 너무나 젊었다는 점 등에서 의아함을 던져준다. 아무리 모델과 관조적인 거리를 두었다고는 하지만 드가처럼 여성 혐오론자가 아닌 다음에야 쉽게 납득 가는 부분은 아니다.■
'교육 > 미술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love theme ①-그림으로 남긴영원한 사랑 (0) | 2007.12.31 |
---|---|
[스크랩] 고흐, 화면에 담겨진 광의의 폭풍 (0) | 2007.12.31 |
[스크랩] 자본에 잠식당한 미술 (0) | 2007.12.31 |
[스크랩] 교감의 직무와 역할(사무관리) (0) | 2007.11.02 |
[스크랩] 이런 교감이면 어떨까요? (0) | 2007.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