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선생을 회억하면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정체성에 관련된 추상적 또는 실상적 신비를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음 때문인가
예술보다 더 영원한 신념의 무거움 때문인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끝없는 표류를 반복하고
약 10만년 전 시작된 간빙기에 출현하여 그 존속을 계속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는 또 무슨 인류문화와 문명을 세우려 고민하는가.
나는 1990년 여름,
대학로 문예대극장에서 백남준 선생을 처음 만난 일이 있다.
[백남준 김현자 퍼포민스] 공연이 있던 그날 밤
나는 백남준 선생의 뜨거운 속살을 보았다.
참으로 헐거운 백남준의 이미지였다.
서양의 하드웨어와 동양의 소프트웨어의 충돌 속에서
그는 참으로 헐거운 삶을 자유롭게 살다간 인생이었다.
막이 오른다.
높은 천정에서 길게 늘어진 흰색 무명 광목에 허리를 메고 달려있는
여섯개의 얼음덩이들은 힘에 겨워 차거운 침을 질질 흘리고 있고
허리의 무개를 잔뜩 조여 맨 광목 포승줄은
점점 얼음의 차거운 살덩이를 녹여 조여들고
그 만큼 추락의 위험은 경고등도 없이
아슬 아슬한 시간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 아래서
김현자라는 한국무용수는 너울 너울 신들린듯 춤을 추고 이었다.
하이얀 엷은 갑사저고리에 선홍빛 치마가
낙수하는 얼음물에 흥건히 젖어 맨살에 달라붙고
얼음물의 찬 기운이 여인의 등 뒤에서 흥건히 조명빛으로 부서지고
십 수년 수절 청상의 살갗은 섬뜩한 오르가슴을 계속하며
어쩌면 희열인지도 모를 경련을 살속 깊이에서 품어내고 있었다.
저 얼음덩이 뚜욱! 떨어지는 날이면,
그러나 정교하게 계산된 시간의 서스펜스.
그 아슬함을 외면한 백남준 선생은 아주 태연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 흘러간 가요 <목포의 눈물>만 계속 반복 연주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관심은 백남준도 김현자도 아닌
천공에 매달려 신음하는 얼음덩이의 위기에 있었던게 확실했던 기억이다.
공연 전 백남준 선생은 연주하던 피아노를 쇠도끼로 산산조각을 내버리겠다는 계획을
공연 진행팀에 미리 알렸었기에 나의 관심 또한 피아노가 부서질
파괴의 시간을 긴장하며 기대해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백남준의 퍼포민스에서 예측은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법을
그때 처음 알았다.
무대위의 위기는 계속되고
우리들은 백남준 선생의 싸인에 촉각을 세워 그를 뚫어저라 주시했고
강렬하게 백남준과 김현자와 얼음덩이를 차례로 순례하는
스포트 라이트도 겁을 먹고 휘청거리고 있을 때,
백남준 선생은 부수겠다던 피아노는 부수지 않고
소형 비디오 캬메라를 한손에 들고
작난감 만지듯 자기의 입 안 이곳 저곳, 목젓과 듬성듬성한 수염,
어둡고 침침한 콧구멍 속과 콧잔등을 타고 넘다가 눈꺼풀과 눈알을 지나 귓속까지
훑어 가면서 한손으로 연주하는 피아노의 건반의 움직임과 피아노 줄의 튕김까지도 샅샅히
탐미하듯 훑어가고 있을 때 그것들을 비추고 있는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포만감으로 신트림을 하는 확실한 그림들이 연속으로 되색임질을 하고 있었다.
그날 백남준의 예술은 과연 고등사기였던가 ㅡ
전위적 행위 상황에서 갑자기 백남준 선생은 방송중계팀이 있던
2층 메인 연출석 까지 헐떡 거리며 숨을 몰아 쉬면서 단숨에 달려왔다.
그리고 다급하게 숨찬 소리를 질렀다
"음향을 크게 높혀욧! 올려욧! 더! 더! 더! 크게!"
겁먹은 엔지니어는 떨리는 손으로 음향을 계속 밀어 올리면서 내 눈치만 살피는데
"괜찮어! 좋아! 좋아! 더 더! 올려욧!"
그때 본 그는 마치 반 미치광이 같이 눈빛에 광끼가 보였다.
그의 지시는 그의 고유한 공연적 연출권리였기에 아무도 말릴 수 도 거역할 수 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벌거벗은 난해한 불협화 음향은 미친듯 찢어질듯 절정의 데시벨에서 진동을 계속하고
그 순간 관객석에서 들려오는 비명들은 순식간에 아수라가 되었다.
관객들은 두 귀를 틀어 막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여기 저기에서 비명을 질러댔다.
충격적 모습들을 차례로 비추던 조명은 암전으로 페이드 아웃(Fade out)되면서
그날의 퍼포민스는 서서히 막을 내렸다.
극장의 조명은 페이드 인 밝게 켜졌다
객석의 여기 저기서 탄식 같은 한숨과 가벼운 웃음들이 새어 나왔다.
성공적인 공연이었다고 다음날 도하 각 신문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백남준 선생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그 무엇을 갈구하는 탐색으로 빛나는 눈빛이 역력했다.
나는 그때 백남준 선생에게 태극선 방구부채를 건네주었고
그는 열심히 부채질로 바람을 일으키며 시니칼한 그 특유의 미소를 보였다.
그날 그는 끝내 그 태극선 부채를 내게 돌려주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 태극선 방구부채의 행방에 관하여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참 그때 그의 몇촌이던가 되는 나이든 친척 여동생이 가져온 인절미 떡을 맛있게 씹으며
허기를 달래던 백남준 선생을 기억해 본다.
그는 평소에도 인절미 떡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날 내가 처음으로 백남준 선생을 만났을 때 훑어 본
작난끼 마져 느낀 그의 문화사적 행위의 한 단면을 두고 오늘 세계인들은
그를 가리켜 "비디오 에술 ,행위예술"의 선구자로 갈채를 보낸다
혹자는 피카소에 버금가는 거장이라는 명예를 얹어 추앙한다.
그의 말대로 과연 그의 예술은 고등사기였을까?
오늘 아침 백남준 선생이 마이애미에서 귀천歸天했다는 소식를 듣는다.
짧은 목숨의 종언終焉위로
안개같은 의구심과 애석함이 연민으로 떠돈다.
곧 그의 무덤위로 치열했던 그의 예술적 햇살이
가슴 아린 상여소리에 섞여 뿌려지게 될 것이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자유를 갈구하며 헐겁게 살아온
문명의 마술사 백남준선생의 예술적 숨소리가
술 누룩처럼 침향무 가락에 젖어 무질서와 혼란의 짓궂은 해학과 파격적 웃음 속에서
예술과 전자기술의 서먹함을 또 누가 무너트릴 것인가
아무도 그의 문화적 희롱에 대하여 알 수 가 없다.
나는 지금 단추 없는 긴 소매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맬빵 차림으로 연신 땀을 흘리던
달인의 환상에 잠시 젖어 본다.
주) * 침향무... 고인의 넋을 달래는 가야금 산조
* 이 글은 고 백남준 선생의 귀천 뉴스를 보고 쓴 글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어 본다.
고, 백남준
글 쓴이* COS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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