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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글/홍해리(시모음)

[스크랩] 『비타민 詩』다시 읽기

본문스크랩 비타민 詩 / 홍해리 지음·우리글 洪海里 다시 읽기

2008/11/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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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페 > 작은 문학 이야기 | 푸른하늘
원문 http://cafe.naver.com/littleliterature/7600


비타민 (홍해리 지음·우리글)=1969년 시집 ‘투망도’를 내며 등단한 저자가 2000년 이후 출간한 ‘봄, 벼락 치다’ ‘푸른 느낌표’ ‘황금감옥’에 실렸던 시를 추려 시선집으로 엮어냈다. 꽃, 낙엽, 산 등을 소재로 자연에 조응하는 삶과 애틋한 감성을 풀어냈다. 8000원.

 

- 동아일보 2008. 11.15.(토)

 

 

 

새천년 들어 드러낸 시집 ‘봄, 벼락치다’, ‘푸른 느낌표!’와

‘황금감옥’에서 내 시의 비타민 C를 뽑아

시선집 ‘비타민 C’를 엮는다.

 

우리는 자연으로 가야 합니다.

시는 우리 영혼의 비타민,

 자연이 되기까지 한 알이면 충분합니다.

 비타민 詩를 복용합시다.

 

- 시인의 말


 

봄, 벼락치다 / 홍해리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
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 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
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푸른 느낌표! / 홍해리

- 보세란報歲蘭


삼복 더위, 가을을 넘더니

아세亞歲 지나

새해가 온다고, 너는

나를 무너뜨리고 있다

네 곁을 지켜주지 못하는

나의 무력함――

겨우내 감싸주지 못한

너의 외로움

밤새도록 몸이 뜨겁더니

안개처럼 은밀하니 옷을 벗고

달을 안은 수정 물빛으로

절망의 파편들을 버리고

드디어 현신하다

수없이 날리는 향香의 화살들

눈물겨운 순수의 충격이다

새천년 첫 해오름과

첫날밤의 달빛으로

수천 억겁의 별빛을 모아

내 가슴에 쏟아붓는,

적요의 환희와

관능의 절정

너는 불꽃의 혀로 찍는 황홀한 구두점

또는

푸른 느낌표!

 

 

 

황금감옥金監獄 / 홍해리

나른한 봄날
코피 터진다

꺽정이 같은 놈
황금감옥에 갇혀 있다
금빛 도포를 입고
벙어리뻐꾸기 울듯, 후훗후훗

호박벌 파락파락 날개를 친다

꺽정이란 놈이 이 집 저 집 휘젓고 다녀야
풍년 든다
언제

눈감아도 환하고
신명나게 춤추던 세상 한 번 있었던가


호박꽃도 꽃이냐고
못생긴 여자라 욕하지 마라
티끌세상 무슨 한이 있다고
시집 못 간 처녀들
배꼽 물러 떨어지고 말면 어쩌라고


시비/柴扉 걸지 마라
꺽정이가 날아야
호박 같은 세상 둥글둥글 굴러간다

황금감옥은 네 속에 있다

 

 

 

물의 뼈 / 홍해리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자리가 다 차면 주저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독 / 홍해리

 

네 앞에 서면

나는 그냥 배가 부른다

 

애인아, 잿물 같은

고독은 어둘수록 환하다

 

눈이 내리던 날

나는 독 속에서 독이 올라

 

오지든 질그릇이든

서서 죽은 침묵의 집이 된다

 

 

 

가을 들녘에 서서 / 홍해리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 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먹통사랑 / 홍해리


제자리서만 앞뒤로 구르는
두 바퀴수레를 거느린 먹통,
먹통은 사랑이다
먹통은 먹줄을 늘여
목재나 석재 위에
곧은 선을 꼿꼿이 박아 놓는다
사물을 사물답게 낳기 위하여
둥근 먹통은 자궁이 된다
모든 생명체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자궁도 어둡고
먹통도 깜깜하다
살아 있을 때는 빳빳하나
먹줄은 죽으면 곧은 직선을 남겨 놓고
다시 부드럽게 이어진 원이 된다
원은 무한 찰나의 직선인 계집이요
직선은 영원한 원인 사내다
그것도 모르는 너는 진짜 먹통이다
원은 움직임인 생명이요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직선이 된다
둥근 대나무가 곧은 화살이 되어 날아가듯
탄생의 환희는 빛이 되어 피어난다
부드러운 실줄이 머금고 있는
먹물이고 싶다, 나는.

 

 


귀북은 줄창 우네 / 홍해리

 

세상의 가장 큰 북 내 몸속에 있네

온갖 소리북채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대는 귀북이네


한밤이나 새벽녘 북이 절로 울 때면

나는 지상에 없는 세월을 홀로 가네


봄이면 꽃이 와서 북을 깨우고

불같은 빗소리가 북채가 되어 난타공연을 하는 여름날

내 몸은 가뭇없는 황홀궁전

둥근 바람소리가 파문을 기르며 굴러가는 가을이 가면

눈이 내리면서 대숲을 귓속에 잠들게 하네


너무 작거나 큰 채는 북을 울리지 못해

북은 침묵의 늪에 달로 떠오르네


늘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북,

때로는 천 개의 섬이 되어 반짝이고 있네

 

 

 

고추꽃을 보며 / 홍해리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 작고 보잘것없는 흰 꽃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어찌 저것이 밀애를 했나
푸른 고추를 달고
소리 소문도 없이 속에 하얀 씨앗을 가득 담는지
햇빛 쨍한 날
어느새 검붉게 피를 토하며
시뻘건 독을 모아
씨앗들을 노랗게 영글리는지
짤랑짤랑 방울 소리를 내는지
참,
모를 일일세
허구한 날
하고많은 꽃 다 제쳐두고
오늘 내 네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은
내 버린 영혼을 네 매운 몸으로
비벼대고 싶어서일까 몰라
오랫동안 햇빛에 취한 너를 보며
내 홀로 골몰하는 것은
너의 우화등선
아니 수중 침전을 위해서인가
드디어
네가 죽어 눈앞이 환하다
세상이 시원하다
어, 시원해,
잘 익어 곰삭은 고추장 만세!

 

 

 

연가 / 홍해리
- 지아池娥에게

                            
맷방석 앞에 하고
너와 나 마주 앉아 숨을 맞추어
맷손 같이 잡고 함께 돌리면
맷돌 가는 소리 어찌 곱지 않으랴
세월을 안고 세상 밖으로 원을 그리며
네 걱정 내 근심 모두 모아다
구멍에 살짝살짝 집어넣고 돌리다 보면
손 잡은 자리 저리 반짝반짝 윤이 나고
고운 향기 끝 간 데 없으리니
곰보처럼 얽었으면 또 어떠랴 어떠하랴
둘이 만나 이렇게 고운 가루 갈아 내는데
끈이 없으면 매지 못하고
길이 아니라고 가지 못할까
가을가을 둘이서 밤 깊는 소리
쌓이는 고운 사랑 세월을 엮어
한 生을 다시 쌓는다 해도
이렇게 마주 앉아 맷돌이나 돌리자
나는 맷중쇠 중심을 잡고
너는 매암쇠 정을 모아다
서름도 아픔까지 곱게 갈아서
껍질은 후후 불어 멀리멀리 날리자
때로는 소금처럼 짜디짠 땀과 눈물도 넣고
소태처럼 쓰디쓴 슬픔과 미움도 집어 넣으며
둘이서 다붓 앉아 느럭느럭 돌리다 보면
알갱이만 고이 갈려 쌓이지 않으랴
여기저기 부딪치며 흘러온 강물이나
사정없이 몰아치던 바람소리도
추억으로 날개 달고 날아올라서
하늘까지 잔잔히 어이 열리지 않으랴.

 

 


여자를 밝히다 / 홍해리

 

여자를 밝힌다고 욕하지 마라
음란한 놈이라고
관음증 환자라고 치부하지 마라
입때껏 치부를 한 것도 없고
드러낼 치부도 하나 없다
여자를 활짝 핀 꽃 같이 밝혀주는 것은
무엇일까
환한 대낮같이 열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어둔 길을 갈 때
등롱을 들듯
꽃이라도 들어야 하는 것인가
등명접시 받쳐 놓고
불을 댕길 일인가, 아니지,
여자는 스스로 열리는 호수
환하게 빛나는 대지라서
하늘 아래
세상에서 여자를 밝힐 일은 없다.

 

 

 


장醬을 읽다 / 홍해리

 

그녀는 온몸이 자궁이다
정월에 잉태한 자식 소금물 양수에 품고
장독대 한가운데 자릴 잡으면
늘 그 자리 그대로일 뿐……,
볕 좋은 한낮 해를 만나 사랑을 익히고
삶의 갈피마다 반짝이는 기쁨을 위해
청솔 홍옥의 금빛 관을 두른 채
정성 다해 몸 관리를 하면
인내의 고통으로 기쁨은 눈처럼 빛나고
순결한 어둠 속에서 누리는 임부의 권리


몸속에 불을 질러 잡념을 몰아내고
맵고도 단맛을 진하게 내도록
참숯과 고추, 대추를 넣고 참깨도 띄워
자연의 흐름을 오래오래 독파하느니
새물새물 달려드는 오월이 삼삼한 맛이나
유월이 년의 뱃구레 같은 달달한 맛으로
이미 저만치 사라진 슬픔과
가까이 자리 잡은 고독을 양념하여
오글보글 끓여 내면
투박한 기명器皿에 담아도
제 맛을 제대로 아는
오, 장醬이여, 너를 읽는다
네 몸을 읽는다  

 

 

 

 

호박 / 홍해리


한 자리에 앉아 한평생 폭삭 늙었다


한때는 푸른 기운으로 이리저리 손 흔들며 죽죽 벋어나갔지
얼마나 헤맸던가
방방한 엉덩이 숨겨놓고
활개를 쳤지
때로는 오르지 못할 나무에 매달려
버둥거리기도 했지
사람이 눈멀고 반하는 것도 한 때
꽃피던 시절 꺽정이 같은 떠돌이 사내 만나
천둥치고 벼락치는 날개짓 소리에 그만 혼이 나갔겠다
치맛자락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지
숱한 자식들 품고 살다 보니
한평생이 별것 아니더라고
구르는 돌멩이처럼 떠돌던 빈털털이 돌이 아범 돌아와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을 뱉고 있다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 돌담 위에 앉아 계시다.

 

 

 

이 맑은 날에 / 홍해리

 

절망도 빛이 돌고
슬픔도 약이 되는
이 지상에 머무는
며칠간
내 곁을
꽃자주빛 그리움으로
감싸주는
그대의 눈빛
아픔도
허기가 져
칼날로 번쩍이는
이 맑은 가을날
그리워라
아아,
한 줌의 적립赤立!

 

 

 
능소화 / 홍해리


언제 바르게 살아 본 적 있었던가
평생 사내에게 빌붙어 살면서도
빌어먹을 년!
그래도 그거 하나는 세어서
밤낮없이
그 짓거리로 세월을 낚다 진이 다 빠져
축 늘어져서도
단내를 풍기며 흔들리고 있네.


마음 빼앗기고 몸도 준 사내에게
너 아니면
못 산다고 목을 옥죄고
바람에 감창甘唱소리 헐떡헐떡 흘리는
초록치마 능소화 저년
갑작스런 발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花들짝,
붉은 혀 빼물고 늘어져 있네.

 

 

 
꽃나무 아래 서면 눈이 슬픈 사람아 / 홍해리

 

꽃나무 아래 서면 눈이 슬픈 사람아
이 봄날 마음 둔 것들 눈독들이다
눈 멀면 꽃지고 상처도 사라지는가
욕하지 마라 산것들 물 오른다고
죽을 줄 모르고 달려오는 저 바람
마음도 주기전 날아가 버리고 마니
네게 주는 눈길 쌓이면 무덤되리라
꽃이 피어 온 세상 기가 넘쳐나지만
허기진 가난이면 또 어떻겠느냐
윤이월 달 아래 벙그는 저 빈 자궁들
제발 죄 받을 일이라도 있어야겠다
취하지 않는 파도가 하늘에 닿아
아무래도 혼자서는 못 마시겠네
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

 

 

 

홍해리 시인

본명 洪峰義, 충북 청원 출생. 1964년 고려대학교 영문과 졸업.

현재 사단법인 <우리시진흥회> 이사장. 월간 <우리시> 발행인

시집 『투망도』(선명문화사, 1969) 『화사기』(시문학사, 1975) 『무교동』(태광문화사, 1976) 『우리들의 말』(삼보문화사, 1977)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민성사, 1980) 『홍해리 시선』(탐구신서 275, 탐구당, 1983)『대추꽃 초록빛』(동천사, 1987) 『청별』(동천사, 1989) 『은자의 북』(작가정신, 1992) 『난초밭 일궈 놓고』(동천사,1994) 『투명한 슬픔』(작가정신, 1996) 『애란』(우이동사람들, 1998) 봄, 벼락치다 (2006년)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황금감옥!』(2008우리글)『비타민 詩』(2008우리글)

 

출처 : 시인의 뜰 <洗蘭軒>
글쓴이 : 洪海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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