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림과 글/홍해리(시모음)

다 저녁때

 

 

 

다 저녁때(치매행1)

 

                                        시 : 홍해리

                                     그림 : 김성로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길을 나섭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히.......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 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그림과 글 > 홍해리(시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 새벽에 쓰다  (0) 2016.07.14
노래  (0) 2015.12.23
마취  (0) 2015.12.23
눈 내린 아침에  (0) 2015.12.17
지는 꽃을 보며  (0) 2013.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