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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글/그림과 시(picture poem)

바닷가에서

 

김성로 [바닷가에서] 70*45cm, 한지위에 아크릴. 1999

 


정도리 바닷가에서


                조영관


행여 바다를 보면

꼬깃꼬깃 꼬부라졌던 생각들이

펴질까

나 여기까지 허덕거리며 왔나


깃털처럼 내리던 눈도 멎고,

이제 섬들도 안개 속에 자우룩하게 잠겼다


땡글땡글한 몽돌들이 달걀처럼 포개져 있는

바닷가를 걷다가

문득

욕망의 집 속에 갇혀 허덕이던

나를 돌에 매달아 바닷물에 그냥 놓아 버리고

후후, 됐다고

이젠 정말 됐다고 손을 털면서

껄껄거리며 허리를 쭈욱 펴는데


웬일로 등허리는 이리 저릿저릿하게 춥고

볼뺨에 떨어지는 달빛은

왜 저리 흰가


검팽나무 까치집 위에

버들잎처럼 달이 돋아서

몽돌에 부서지는 물결마저 희고

용처럼 회오리를 치며 뻗친 손들이

아우성 같아서

난 저린 손발을 풀지도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바지랑대처럼 섰다


동백나무, 생달나무, 붉가시나무, 우거진 숲으로

달빛은 밀물처럼 와서 부서지고

은빛 고드름이 번득이는 숲으로

아주 가벼운 바람이 설렁거리는데

끼육끼육

머리끝을 날카롭게 휘젓고 가는

새야,

이제 집착할 무엇이 남아 있다고

너는 또 사슬이 되어 나를 묶느냐


바다를 허리에 두르고

허튼 농담이라도 한마디 씨부리고 싶어

나 여기까지 허덕거리며 왔나


저편 산코숭이 해송의 귀를 억지로 잡아당겨서라도

쏟아지는 파도 소리에 묻혀 쉬고 싶었는데

집착할 그 무엇이 남아 있다고 파도야

어쩌자고 너는 저편에 잠들어 있는

눅눅한 사랑을 자꾸만 불러내는가

 


조영관 시인
1957년 전남 함평 출생
1984년 서울시립대 영문과 졸업
도서출판 일월서각 근무
1986년 이후 노동현장 활동
<노나메기>창간호에 시 <산제비> 발표
2002년 <실천문학> 가을호 실천문학 신인상 시 부문 당선

2007.2 간암으로 사망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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