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큐레이터 인턴제도
"시대변화 불구 인재양성 소홀-저임금에 정체성 혼란"
글. 홍경한(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큐레이터 인턴 구함. 급여 30만원. 식비 제공. 6개월 이상 근무할 자'
모 미술관련 사이트에 올라온 한 유명 갤러리의 구인 광고 중 일부이다. 한달에 30만원, 고맙게도 식비는 제공한단다. '공부도 하면서 잘하면 정식 큐레이터로 채용 가능'이라는 식의 삐끼성 설명도 붙여 놓았다. 일부에서 이런 저임금의 큐레이터 인턴을 실시하지만 교묘하면서도 합법적이며 노동력 착취같지만 누구도 이를 제기하지 않아 왔기에 문제도 없었던 '정/상/적/인' 광고물이다. 아무리 인턴이라지만 일요일도 없이 일해야 하는 갤러리 특성상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대우를 받고 일 할까 싶다. 허나 갤러리 관계자들은 행여 지원자가 없을까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바닥을 보이는 급여를 주더라도 언제나 줄을 섰기에 그야말로 아쉬울 게 없다.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큐레이터에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큐레이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미술계가 황금빛 찬란한 미지의 세계로 보이는지도 모르겠고 우아함과 세련됨이 어우러져 있는 그런 곳쯤으로 여기는 지도 알 수 없다. 여기에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면 자신의 의지대로 미술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쓸 수도 있다는 매력이 있으며 사회적 명예도 그리 낮지 않다는 여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같다. 허긴, 이런 상황에서 빈약하기 짝이 없는 봉급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힘들겠지만 차근히 경력을 쌓다보면 꿈에 그리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작지 않은 희망을 기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물론 미술계는 여타 장르처럼 다양한 직업군이 존재하지 않기에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들에게도 큐레이터는 호감 가는 직업이다.)
하지만 우리 미술계에서 이직률이 높은 직업으로 손꼽히는 게 큐레이터라면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성경말씀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 는 구절이 있다. 노력하면 원하는바를 이룰 수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담은 내용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우리나라 큐레이터 현실에 올곧게 적용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독하게 마음 먹고 인턴부터 시작해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은 차갑고 이기적임을 깨닫게 된다. 일은 너무나 고된 반면 가치는 인정받기 힘든 경우가 빈번하다. 처음부터 박봉인 것을 알고 시작했다지만 고생한만큼 비전을 담보하기도 어렵다. 일반 갤러리에서 하는 큐레이팅이란 것도 그림의 떡이기 십상이다. 몇 년을 해도 변변한 기획 한 번 맡기는 커녕, 차 심부름, 경리, 운전기사 노릇을 비롯해 온갖 잡다한 일만 쌓여가곤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이라면 그는 갤러리스트(화랑에서 다양한 허드렛 일을 하는 부류)이지 큐레이터가 아니다. 설사 훗날 "이건 아닌데"라고 깨달았다손 쳐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는 것 역시 뭣하다. 관장이나 대표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 그 자리를 내던져야 할지도 모르고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할 사람은 많기에 도의적인 책임을 요구할 수도 없다.
재정이 여의치 않은 대안공간이나 사립미술관 등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자본력이 있음에도 진정으로 큐레이터를 양성하고 자본과 시간을 투자하는 갤러리는 몇이나 될까 말까다. 아니, 솔직히 난 그런 갤러리를 본적 없다. 운영이든 기획이든 자기들 자식에게 물려줄지언정 처음부터 대의적인 명분 아래 건설적인 플랜을 담고 있는 큐레이터 진흥 프로그램을 접하긴 힘들다.
실제로 많은 큐레이터 지망생들이 선호하는 일부 유명 갤러리들. 미술관 이상의 시설과 명망성, 비공식적인 작품소장을 하고 있어 인기가 높지만 갤러리스트로 남을지언정 정식 큐레이터로서 활동하기엔 문턱이 높다. 오너들의 자제들이 득세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설립자의 아내, 자제들, 정관계 자제들이 관장이나 대표 이름을 달거나 기획자로 참여해 조상덕을 톡톡히 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걔중에는 인턴부터 밟아 큐레이터가 되고 수석큐레이터가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분포도는 빈약할 뿐만 아니라 국내 주요 사립미술관이나 유명 화랑주인들이 대기업 사주의 아내이거나 2세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대물림되는 것에 비할바는 아니다.
물보다 진한 피, 내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욕심, 수요와 공급의 극심한 불일치. 이 모든 것이 다수의 비전을 가로 막는다. 더구나 이들은 하나의 미술권력으로까지 작용한다. 그렇다고 특정한 검증과정이나 절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죄다 실력이 출중하여 매번 기획하는 전시마다 대박을 터트리는 것도 아니다. 문화 사업은 그 어떤 것들 보다 사회적 환원을 중요한 윤리로 내세워야하고 그에 따른 투명경영이 이뤄져야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네 갤러리들에선 그런 모습들을 그리 자주 발견할 수가 없다. 그래야한다는 식자들의 발언이나 주변 의식들도 접하기 힘들다. 이런 현실에서 큐레이터의 발전상을 염두에 두는 것은 미련한 상상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큐레이터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일개 화랑의 사환노릇이나 시켜서는 안 된다. 운영자들은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심도 있는 글쓰기가 가능해지고 큐레이팅에 대한 이해와 밀도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과거와는 달리 학예사증이 있던 없던 고등교육에 따른 적당한 글쓰기와 기획력은 갖추고 있다는 게 내 경험상 생각이다.)
물론 몇몇의 인사들을 통해 입증되었듯 이들 중 일부는 현재 기존 비평가들을 대신해 국내외 대형 전시를 이끌어 가거나 성패를 좌우할 정도의 입지를 다지며 미술계는 물론 학계, 언론 등으로 발 빠르게 진군 중이다. 이는 그들이 능력 면에서 뒤쳐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터전만 제공하면 분명 성공한 케이스로 확인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시스템이 고착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선 빛을 보기가 어렵다.
한편 갤러리가 아닌 미술관에서도 큐레이터(학예사)로서 성공하기란 매한가지로 어렵다. 별도의 학예사증이 없어도 되는 갤러리에 비해 상당히 까다로운 자격을 갖춰야 하는 미술관에서는 의무적으로 관련 직원들을 채용해야하지만 열악한 재정상 넉넉한 인재확보란 어렵다. 따라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필기시험을 거쳐 수년간의 실무를 쌓거나 관련학과 대학원을 나와 일정한 기간 다시 실무경험을 가져야 비로소 학예사 자격을 인정 받을 수 있는데 그나마 실무를 쌓는 미술관도 문광부에서 인정한 일부에서나 가능하고 설사 학예사자격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상위 학예사로 나아가는 것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야 얼마든지 해 볼만 하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일한만큼 댓가를 얻는다면 못 할 건 또 뭔가. 그런데 웃기는 건 어딘가에선 이미 내정해 놓고선 공채를 한다거나 하는 식의 불공정한 채용 의혹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인맥으로 돌아가는 미술계라지만 공익성을 배제하고, 평등한 기회를 박탈하면서까지 그래야 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인턴 큐레이터 한달 임금 30만원. 이건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 싶다.(허긴, 정식 큐레이터가 되었다 해도 박봉인 것이야 별 변함이 없지만) 한해 수십억 원을 돌리면서 고작 30~40만원의 인건비조차 아까워 한다는 것은 아무리 수요와 공급이 불일치 한다 해도 지나친 횡포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갤러리는 단순한 장사이기 이전에 미술문화의 기초를 형성하는 중요한 틀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따라서 그에 맞는 격과 구조부터 갖춰야 한다. 그 시작은 내 안으로 들어 온 인재부터 챙기는 것에 있다.
참고로 본인 스스로도 갤러리스트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큐레이터가 될 것인지 심도 있게 연구하고 공부해야 함은 당연하다. 또한 미술에 관한 애정으로 헌신할 수 있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정작 갤러리스트 정도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유명 갤러리의 명망성에 기대어 거들먹거리는 일은 안 해야 옳다. 아주 가끔씩 그런 경우를 만나는 데, 상대의 인격을 생각해 말을 안 할 뿐이지 사실 무척 가소롭다. 이는 내가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깍아 내리는 또 하나의 그릇된 방법이자 큐레이터의 본질을 이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다수에게도 상당한 민폐라는 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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