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강용환
아집에 갇힌 의식을 깨었다고
울안에 갇힌 둥지를 넘었다고
희열에 갇힌 말문이
먹이를 낚아챈 부리보다 나으리까
혈투에 찢겨진 상처는
반사경에 비춰진 자존이기에
어섯이 깬 자존의 혈투는
자궁에 웅크린 태아보다 못하다
중용의 양 비경을 비추어
독 생에 호통을 보면
홀로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요
홀로
죽어있어도 죽어있는 것이 아니기에
삶과 멀어진 존재의 위대함에
알을 깨리라
중용의 음 비경을 비추어
자학에 호통을 보면
네 영혼에 얹혀가는 삶은
내 존재를 죽일 뿐
보잘 것 없다는 미천함에
알을 깨리라
존재에 붉어진 물음표 하나
조화의 중용에 느낌표 하나
모나면 모 난대로
불거지면 불거 진대로
벗은
있는 그대로의 빛나는 존재
조화의 정을 담아 하나로 가리
***
본 글은 우리시자유게시판의 분할구도(分割構圖의 천재, 김성로 화백의 그림세계, 만다라(曼茶羅)라는 주제를 가지고 문화평론가 겸 시인, 방송인인 손 소운선생의 감상에 매료되어 본인의 느낌과 이상을 적은 글이다.
글을 올리며
삶에 완전한 진리란 없다.
다만 산과 강과 같이 불거지면 움푹 파인 곳이 있는 것처럼 어떤 사물이나 정신세계의 반사들은 음양에 평을 찾아갈 뿐이다.
인간이 음양을 가려 중용을 찾아 간다면 이는 평탄이다. 하지만 평은 순탄함은 있지만, 처음과 끝이 있기에 꼬리에 꼬리를 잇는 순리에 맞지 않아 자연조화에 어긋난다.
본디 순리는 처음과 끝이 없다.
삶의 굴레에 어찌 처음과 끝이 있을 수 있는가. 처음과 끝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단어에 불과 한 것이다.
이승이 있으면 저승이 있고, 저승에서 못다 한 삶은 이승에서 만나는 윤회가 아닐까.
만약 삶의 굴레에 처음과 끝이 있다면 우주는 벌써 종말을 맞았을 것이고, 삶에 선과 악을 갈라놓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땅에 선과 악이 없다면 오로지 욕심인 약육강식만 존재한다. 강자만이 존재하는 세상, 강자만이 군림하는 세상에 벗이 어디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결국 욕심이 강한 강자만이 홀로 남고 홀로 남은 생마저 끝을 맺는 멸망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이런 이치를 알면서도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최고의 하나로 군림하려 든다. 사람을 군림하고 자연을 군림하고 우주를 군림하는 독존들은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홀로 가리라.
하여 신이 내린 순리는, 굴곡의 고리와 고리로 연결되어 벗의 반사경인 음양의 평등함으로 어우러진 것이다.
우리가 모든 자연과 우주와 일치를 이루어 완전한 원을 찾을 때 이것이 곧 벗이요 진리다.
삶에 완전한 진리는 하나요, 진리에 하나는 곧 둥그런 벗이기에 원에는 처음과 끝이 없다.
사랑도 벗으로 가는 굴레에 관심이지 사랑이 진리가 아니다.
그러니 처음과 끝이 있는 하나라면 존립이 없는 것이요. 설사 존립에 하나가 있다 해도 인정해 줄 벗이 없으니 살아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요. 죽어있어도 죽음을 알지 못하는 고통이 있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때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고, 자연의 모든 생을 인정할 때 지구의 모성과 어우러질 것이요. 자연과 자연이 어우러져 수많은 존재가 정을 담으면 모두 둥근 빛을 내는 하나로 간다.
나는 김 성로화백의 작품을 바라보면서 이런 하나로 가는 벗의 감동을 얻었다.
'그림과 글 > 평론, 작품감상(review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임을 위한 행진곡 / 淸 河장지현 (0) | 2009.06.03 |
---|---|
[스크랩] 묵언마을에서의 김성로 화백의 작품시연을 보면서 느낀 깨달음의 감상문 (0) | 2009.05.20 |
[스크랩] 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0) | 2009.05.17 |
김성로 화백의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충렬 (0) | 2009.05.12 |
[스크랩] 아름다운 세상 (0) | 2009.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