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향(回向)
글 : 신현락
그림 : 김성로
1
골목길 이면도로에 채 녹지 않은 그리움들이 자꾸 미끄러지며 헛바퀴 도는 해빙기의 아침, 연탄재 같은 메마른 슬픔이라도 길바닥에 부리고서야 길은 제 몸 밖으로 나서는 길을 허락한다 갈대숲을 보러 가는 길, 때마침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철새는 날아가고’, 구슬픈 피리소리를 따라서 콘도르는 마추피추의 산정에서 날아오른다 더 오를 곳 없는 산정 같은 곳에서도 날아야 할 까닭이 있어야 했음을 그 시절엔 짐작이나 했으려나
나에겐 정신의 높이가 그들에겐 삶의 바닥이었으니
그 노래의 슬픈 악보를 이미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2
내 생의 간선도로가 단선일 때, 먼 곳이 그리워지면 철새의 지도를 펴고 방향을 가늠하곤 했었다 가늘게 떠는 나침반의 바늘 끝은 쇄빙선으로도 갈라지지 않는 빙하기, 기억의 결가부좌, 돌아오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극지를 가리켰던가
추월금지의 황색선이 도로의 중앙을 가르며 멀어지는 방향은 철새가 날아오르는 쪽이다 울퉁불퉁한 노면을 읽느라고 지친 차를 세운 갓길, 주정차금지구역과 철새보호지역이란 푯말이 나란히 서 있다 아이들 오줌을 누이던 사람들 슬금슬금 갈대숲 사이로 숨어들고 더러는 지평선을 바라본다 철새를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과 같이 서서 보는 습지의 물길
생각해보면 내게만 있었던 굴곡이 아니었는데 내 생은 왜 늘 갯벌의 만곡처럼 안쪽으로만 길게 휘어져야만 했는지, 그 질퍽이는 바닥에 더는 발목을 담그지 못하고 쫓기듯 도망쳐왔던 기억의 내항을 누군들 가지고 있지 않았으랴
3
저쪽, 철새가 나는 곳, 피안의 강기슭,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근원 같은 곳으로 점점점 말줄임표로 사라지는 철새의 푸른 울음소리를 옮겨 적은 이의 애틋한 눈빛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눈빛 끌어안고 세상에서 멀리 간다고 바람과 날개 부딪던 울음 겹겹이 몸에 두르며 홀로 떠돌던 길들이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안다
그 길의 끝에서 나는 노래의 잔여울이 생의 이면도로를 열고 보여주는 지평선을 본다. 그리움의 간선도로가 무한한 단선으로 이어지는 거기, 서로의 몸을 기대면서 혹은 부비면서 수만 평의 무량한 울음으로 회향하는 갈대숲
4
늘 한 옥타브 낮은 저음의 밀물이었던 내 노래의 피안은 여기까지였을까
산정에서 날아오르는 콘도르의 비상은 천상과 지상의 사이시옷소리, 자유를 갈구하는 춤이었으니, 방랑하는 영혼이여! 쫓겨 다니던 날개의 더운 눈물이여!
해빙의 바람은 곧 저 갈대숲 수만 평의 울음마다 불의 날개를 매달 것이다 봄은 햇잎의 보료위에 만다라의 햇살 펼쳐주리라
더 갈 거니? 갈대숲은 정신의 높이와 슬픈 악보의 차이를 묻는다
여기서 더 가려면 슬픔의 중력으로 가라앉던 울음의 지평선을 밟고 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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