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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글/신문, 잡지소개(news)

[스크랩] 김성로 원고 시 5편입니다.

십리대밭 / 김성로

 

한참을 아무런 생각 없이 걷는다

어둡게 우거진 대숲 소롯길

생경한 이국 풍경처럼

마음속 낯선 세계로 들어선다

대숲 속을 걸으며

마음속을 걷는다.

 

어떻게 살던 정답이 없는 삶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걸어갈 뿐이다

예쁜 풀밭을 보면 잠시 쉬어도 가고

복잡한 일이 생기면

한 발 뒤로 빠져 다시 반추도 하며

홀로 슬그머니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제부도 / 김성로

 

개펄 너머

먼바다로 향하는 발걸음

하늘과 땅의 경계가 모호하다

 

다른 행성에 온 듯한 풍경 속

우주 한가운데 미망(迷妄)의 존재

공허와 환각 사이

그 경계선을 걷는다

 

사막 같은 해변 구릉 위

한가로운 구름 한 점

그리고 무심히 바라보는 나

저기 어디쯤

반짝이는 눈물이 있더라도

차마 발걸음을 떼기 어려운 외로운 풍경

풍경도 삶도

멀리서 보는 것이 아름다운 법이다.

 

 

 

 

 

용문산 / 김성로

 

산봉은 구름에 덮여 보일 듯 아련하고

추녀 끝 풍경은 빗소리에도 은은하다

보이는 듯 들리는 듯 지주에 기대인 몸

세속 시름 잠시 잊으니 푸르게 깨어나는 산 빛이여!

 

계곡물은 비명을 지르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바삐 달리는데

바위 이끼 틈에 뿌리 내린 야생초는 내린 빗물로 온몸을 흔들며 웃고 있다.

이 어린 야생초는 여린 뿌리의 간절한 염원으로 언젠가 결국 바위를 쪼개는 것을

나무는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고

물은 장애를 만나면 더 힘을 내어 세차게 흐른다.

은행나무도 천 년을 버티기 위해 넓게 뿌리를 내렸으니

자갈을 헤치고 바위를 뚫어 물을 찾는 천 년 노력에 비한다면

인간사 눈앞의 작은 고초쯤이야 스쳐 가는 소낙비 정도 되려나?

여기 크게 웃으며 한마디 하련다.

'아따, 저 굽은 소나무 참 멋지제!'

 

 

삼봉해수욕장에서 간월암까지 / 김성로

 

거센 파도가 몰아쳐 내 몸은 조금씩 깎이어 가지만

먼바다를 꼼짝 않고 바라보는 천 년 기다림

슬픔마저 굳어버린 나의 머리와 가슴에

언제 저 나무가 뿌리를 내렸던가

언제 저 작은 꽃들이 피고 지곤 했었던가

기다림으로 갈라진 가슴 사이로 시원한 해풍이 지나갔다

푸르고 아름다운 7월의 풍경이 보이고

짭조름한 바닷내음을 풍기는 계집아이의 싱그런 웃음도 지나갔다

파도에 떠밀려 온 소라껍질이 발밑에서 다글다글 이야기를 전한다

삶은 그러하다고

 

넓은 바다만 바라보는 천수만의 외로운 간월암

만공선사의 간절한 염원이여

선사는 왜 육지를 떠나 섬으로 왔는가?

수평선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작은 섬

왜 사람들을 떠나 외진 곳으로 왔는가?

속박된 것은 몸인가? 정신인가?

어쩌면 그대 자신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말 / 김성로

 

좁고 가파른 계단처럼 힘들고 어려운 길을 오르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서서히 허물어져 가는 삶이여

"부디 건강해라."

"살아보니 건강이 제일인 거라."

뼈만 남았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한사코 고개를 젓는 노인

말기 암으로 3개월을 물만 먹고 살고 있다고 한다

이제 다시 보지는 못할 터이다.

 

허, 다 필요 없는 기라

모두 사라져 가는 기라

봐라. 아무것도 못 가져간데이

그리고 무덤 속으로 가면

하나하나 잊혀지는 게 인생이다

마 잊어뿌리고 사는 게 인생이다 아이가. 그제?

 

돌아오는 길

고달픈 집착 하나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출처 : 한국영상문학협회
글쓴이 : 김성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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