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로 [ 만다라] 90*90cm, 한지위에 아크릴. 2008
요즘 자주 거울을 보네 / 손홍국(손소운)
거울을 보네 거기 탈 하나.
슬며시 웃음 머금고 있는 나이 듦.
다시 바라보네
듬성듬성한 연치年齒를
거기 늙음 배인 주름 여럿.
골 깊은 세월을 쏘다닌 나무 한 그루로 선 세한도歲寒圖.
어룽지는 추억의 사립을 열고
아득히 열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짚어보네.
얼마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지금은 조용한 등대와 같은 사유思惟부근
아득한 시원始原의 바다에서 유배되어 온
목쉰 소명의 뱃고동 소리
양팔을 끼고 못 박고 있네.
한 무더기 억새풀을 흔들고 달려온
혁명을 꿈꾸던 바람소리 슬프네.
인생의 처마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골골한 낙수물 소리 듣네.
아득한 역두驛頭에서 떠나오던 쓸쓸함 같은 회억回憶 몇 토막.
오래전 아주 오래전
유랑의 무리들 빼곡히 들어찬 카오스의 숲
헐벗은 나무들 사이로 아우성이 즐비하던
분주한 도시의 아침을 추억해 보는 메마른 기침소리
딱따구리 부리로 무섭게 생존을 쪼아대던
피멍을 생각해 보네.
그러나 지금은 노화老化로 출하된 허상의 날개짓임을
나는 알고 있네.
핏물같은 것이 곡진曲盡한 마음에 남아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씁쓸한 웃음으로 남는 서성거림의 고요
그러나 별로 재미가 없네.
외진 골목 어디에서던가
암호같은 눈빛을 마주하며
비밀스런 사랑의 실타래를 풀던
첫사랑의 기억이 그래도 재미있네.
숨겨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불 꺼진 창을 뒤로 보랏빛 휘파람을 불며
가회동 긴 골목을 빠져 나오다가 통금에 걸려
종로통 어디메던가 파출소에서 쪼그리고
새벽을 기다리던 그때가.
그래도 재미있네 재미있네.
알음알음으로 몇 놈들 만나 쐬주 한잔 눈을 찡긋
종로의 낭만, 명동25시, 사직동 대머리집, 광화문 열차집,
삼선교 토굴집, 또 어디 어디를 밤새 돌며 곤드레 만드레
술잔에 별을 담아 한 꺼풀씩 낭만의 옷을 벗어
시詩를 토하며 공복의 문화를 들쑤시며
억압이 없는 자유의 찬탄을 노래하던 곳
변혁기의 궤양을 앓던
숨찬 공화국의 아픈 불빛들이 명멸하던 날에
가슴으로 가슴으로 터져나오는 시 한편 쓰지 못한 것이
참으로 미안한 일.
허무로 부터 벗어나려던
그 슬픈 욕구와 감수성의 이중성이 영원한 멜랑콜리의 숲
비탈진 곳으로
목놓아 울어 쏟아지는
병든 역사의 세월을 훔쳐보네.
용서하라 바퀴들이 헛돌던 날을
젊음이 빛났던 푸르른 풍요의 빛 다 써버리고
아직 채 익히지 못한 인생길 어디쯤에서
다시 거울을 보네.
거기 늙음이 포의布衣를 걸친
어슬렁거리는 그림자로 남는
탈 하나
가까이 오라
가까이 오라.
< * 2006년도 남서울신문 新春文藝公募 시부문 당선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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