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림과 글/손소운(글모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손소운

 

 

 

나는 엊그제 오는 5월 17일 열리는 어유문학제를 기획하고 있는 여유중학교 교감선생님이자 화가며 시인이기도한 김성로 선생님과의 진행문제에 대한 협의차 한국영상문학협회 소속 이옥선, 이세종 시인과 함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어유지리에 위치한 어유중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우리가 그 학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1시경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 도착하여 학교주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주변을 살펴보다가 어디로엔가 자꾸만 깊이 빠져들면서 흡인되어가는 이상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좀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어렴풋이 떠 오르는 추억이라는 기억재생의 시간을 되돌려 보는 블렉홀 깊이로 자꾸만 빠져들어가는 느낌을 의식했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생각된다.

당시 <시대상의 기억>과 현재 <추상적인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묘한 심상적인 블렉홀, 그것은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숨찬 젊음의 시간이 자리하고 있던 내 청춘의 한 때를 여지없이 투과시켜 보는 초시간적인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으로부터 50년이라는 반세기를 훌쩍 뛰어 넘어들어가는 미스터리의 시간여행이었다.

따라서 나는 나의 잃어버린 시간여행을 통해서 50년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려보는 기억소생을 위해 추억의 지퍼를 천천히 열어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받치고 있는 근간의 시간을 열어보는 공간의 기하학 그 심리적인 변이도 함께 동시에 의식할 수 있었다.

그랬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고 나의 생애는 속절없이 유전을 했다. 50년이나. 그랬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전 이라는 시간의 경과와 실재라는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는 나의 과거를 완전히 재현시킬 수 있는 기억은 나에게 오랫동안 간직되어왔던 잊지못할 추억이다.


되찾은 기억, 나는 그 힘찬 여운을 지금의 어유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땅의 위치에서 서정적인 추억을 떠 올려본다. 일종의 수상록에 못지 않은 회화적인 어유지리에 묻힌 추억은 나의 일생에 있어 나의 인간구성의 일대 전환기에 속했던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들이었다.

지금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 까지는 이 모든 추억들이 그저 추상이라는 이름으로 현장감 없는 상태로 레테의 강(망각의) 어느 깊이로 침잠해 있었던 것들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놀랍게도 내가 반세기전에 실제로 생활하고 있었던 그 자리에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보며 노년기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오랜 그리움의 연민으로 나를 맴돌던 아슴아슴한 추억이 떠 오른다.

나는 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재미있는 추상의 유추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도의 에피소드로 구분해서 추억해 보기로한다.

(1, 문학의 서정적인 서곡2, 사랑과 우정이 꽃피던 시절 / 3, 398고지의 전투 )


1, 문학의 서정적인 서곡

현재 어유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위치는 지금으로부터 50년전에는 국군 제 6군단 직활 교육대가 주돈하고 있었던 군부대자리다.

나는 1958년 이 부대에 배속되어 교수부란 부서에서 교관생활에 복무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군에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자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군 복무시간이 많았던 고참 하사관들로 대부분이 하사, 중사, 상사계급에 속한 군인들인 한글반 피교육자들과 기술병과인 수송반에서는 운전병반과 자동차 정비병반,

그리고 당시 처음으로 군 정규교과과목으로 편성된 태권도반, 그리고 하사관이 아닌 장교들로는 당시 우리 군에서 처음으로 신설교육교과로 편성된 원자교육반이 있었다.

이 장교피교육자들은 대부분 육사에서 신참소위로 계급장을 달고 온 당시 육사17기생들이었다.  이들 피교육자와 이들을 교육시키는 각반의 전문교관들이 이 부대에 주돈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호박돌(주먹 크기의 몽돌)괴 황토흙에 짚을 썰어 넣아 찍어낸 흙벽돌과 나무로 지어진 단층으로된 군 막사가 있었다.

지금의 어유중학교 본관 자리에 당시 본부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 현관은 당시에도 현관 자리며 교무실 자리는 당시 1과인 행정과가 있던 자리이고 교무실 옆에는 병기창고가 있었고

그 옆으로 원자장교반 교실이 있었으며 또 그 옆으로 지금의 관사자리에 장교들의 숙소와 우리 교관들의 숙소가 있었다.

현 본관에서 왼쪽으로 내가 소속되어있던 작전 및  교수부가 있었고 그 옆으로 태권도 교육실.수송부, 각과별 교관실 1,2종 보관창고가 있었으며  현 운동장은 당시에도 연병장으로

왼쪽으로 약간 경사진 곳으로 30여동의 피교육자들 막사와 탄약고와 휘발유 보관 창고가 땅굴 형태로 위장되어 있었으며 주보 라는 지금의 매점PX가 있었다.

그리고 연병장 현 교문자리에 위병소가 있었고 지금의 학교 주변 다섯 곳에 군 시설을 보호하는 초소가 있었다.

당시 나는 교수부에서 작전교육명령으로 하달되는 문서에 의한 교육편성과 진도진행 보고서작성, 군사일지작성, 교육행정, 한글반 교관 일을 맡아보고 있었는데 우리 교관들은 비록 일등병, 이등병, so군번(당시 대학생으로 입대한 단기 복무자) 과 상등병에 속한 게급이었지만 계급장 없이 교관이라는 완장과 모표를 착용했으며 그 시절 머리를 길렀고 전원 포마드를 발라 아주 단정한 복장으로 피교육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었다.

당시 나와 가까이 한솥밥 먹으며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전우로는 미국의 명문대 버클리대학에서 동서양비교철학 석좌교수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 존경받았던 김상기 교수와 뮌헨대학이던가에서 교수로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안창선 교수,(그는 당시 독일 여학생과 펜팔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소기업은행 부행장을 하던 민은홍선생, 3과장이던 최찬옥 대위.등이다 당시 나는 이 부대에서 많은 책을 읽어 책벌레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문학서적에 푹 빠져있어 나의 생애를 통해 문학의 서정이 서주로 시작하던 매우 의미깊은 시절이었다.

당시 이 부대에 복무할 당시 국군 전군 장병을 대상으로 시 공모가 있었는데 나는 <표정의 의미>라는 시를 응모하여 당선이된 바 있다

요즘의 신춘문예만큼 비중도 있었으며 매우 공정하고 엄격한 심사를 했었다

이 시 공모는 미 8군 극동군 신문 bulls eyes 紙에서 주최를 한 것이며 당시 이 공모를 맡아보던 사람은 당시 미군 소속 정훈공보병이던 유경환 시인이었다.

내가 당선하자 전화로 당선소식도 주었고 또 직접 이 부대를 찾아왔던 유경환 선배는 보기드문 수려한 미남이었으며 영어를 특히 유창하게 하여 제대후 미국 유학을 다녀온 수재였다. 아무튼 나는 내 나이 20대 초, 숨찬 젊음 한 때 문학적인 정서의 서주가 시작되던 서막을 이 곳에서 열개되는 추억이 새로운 곳 이다.

그런데 이런 추억이 어린 곳에서 50년이라는 시차를 뛰어 넘어 오는 5월17일 어유문학제에

서 문학강연을 하게되다니 참 묘한 기분을 떨칠 수 가 없다.

우연치고는 정말 미묘한 우연의 유전을 경험하게된다.


2, 사랑과 우정이 꽃 피던 시절

내가 이 부대에 복무할 무렵 군대에 들어오기 전부터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상대는 미모의 E대생 철영(가명)이라는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님의 도승지(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에 해당)의 증손녀이며 부모가 다 의사였던 명문집안의 규수였다.

그녀는 특히 가곡을 잘 불렀는데 내가 가곡을 즐기게 된 취향도 아마 그녀의 영향이 컷던 것 같다 그녀는 내가 부르는 오 솔레 미오, 별은 빛나건만, 옴부라 마이푸 같은 곡을 특히 좋아했다

휴가를 나가면 나는 명동에서 그녀와의 데이트에 정신이 팔렸고 성북동 뒷산 큰 바위에 사무칠 澈, 사랑 愛, 이렇게 사무치는 사랑이란 뜻이 담긴 “徹 愛” 라는 글자를 무딘 돌로 바위에 새겨놓고 사랑의 결의를 다진바 있다.

또 그녀는 내가 보고싶은 날 에는 나의 죽마고우 정동환군과 함께 당시 서울에서 전방인 이곳까지 자가용을 타고 면회를 오곤해서 부대안에서 나의 러브스토리는 크게 선망의 대상이 되곤했으며 일주일에 두세번씩 러브레터가 오고갔는데 당시의 부대장이 얼마나 짓궂었던지

문서병이 나의 수발해 오는 문서행낭속에 내 편지를 찾아내어 부대장 앞에서 크게 낭독하게 하는 일도 있어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현재 어유중학교 터는 나의 일생에 있어 “사랑과 우정이 꽃피던” 매우 의미 깊은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3, 398고지의 전투

지금의 학교 운동장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산이 당시의 398고지였는데 우리 부대에서 완전무장을 하여 도보로 행군훈련을 하던 곳이다.

또 당시에 기합으로 어떤 때는 398고지 정상까지 구보로 왕복하는 단체기합을 주던 곳이기도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낮은 산 같지만 실제로 올라가 보면 제법 험한 암벽도 있고 계곡도 있어 험한 지형이다.

가만히 추억해 보니 몽매에도 잊지못할 전투경험이 유령처럼 되살아난다

1958년 어느 가을이었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 오후여서 교육이 끝나고 모두들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피교육자병사도 교관들도 모두 자유로운 자기만의 시간에 흠뻑빠져 한가로운 시간으로 외출도 하고 병영안에서 주보를 이용하여 막걸리도 마시고 세탁도 하고 헤어진 군복도 꿰메고

하는 일로 소일하고 있던 때로 기억된다.

오후 16시경 원자교육반 장교 세명이 황급히 작전과로 뛰어들어 정체불명의 괴한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교육생이던 조병옥 소위가 피살되었다며 시신을 메고 들이닥쳤다.

당시 나의 나이로는 판문점 회담으로 쌍방이 휴전된지 겨우 3,4년 밖에 안되긴 했지만

적과의 교전이라는 전투적 어휘에 대해 도저히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무튼 이 사건을 나는 즉시 주번 사령이던 최찬옥 대위에게 보고를 하는 동시에 교수부장과 부대장 및 모든 외출병력에 원대복귀조치를 취하는 한편 시신을 포천에 있던 야전병원으로 후송을 했다

이윽고 군단과 인근 부대에 비상조치가 취해졌고 전시체계의 출동부대들이 속속 연병장 (지금의 운동장)에 집결되고 교수부에 지휘본부가 급히 설치되었다.

당시 6군단장 백인엽장군휘하에 작전참모들과 예하 부대장들 지성환헌병대장(나중에 고대 위수령 사령관) 강영훈 부군단장(나중에 국무총리 하신분) 포병부대 병기 기갑연대 탱크 및 장갑차들과 군 엠블렌스 차량과 의무병들, 투입될 야전군병사를 실은 트럭들로  운동장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물론 인근에 민간 가옥은 얼마 없었지만 통행금지령이 내려지고 군인들로 사주경게가 이루어진 동시에 공격작전이 개시되었다.

모든 병력에 실탄이 지급되고 완전무장이 되었다

나는 피교육생들을 안전지대로 이동시킨뒤 김상기 교관에게 경계임무를 하달한 뒤 공격부대 후방으로 선발대를 따라서 398고지로 이동했다.

드디어 날이 어두워지자 공격하던 전투부대는 작전명령에 따라 그 자리에서 사주경계로 바뀌어 7부능선에서 머물며 모든 병력은 저마다 야전삽으로 개인호를 파고 사주 경계로 들어갔으며 지휘본부에서는 수색대 1개 소대를 급히 편성하여 적진으로 추산되는 바위산 쪽으로 투입시켰으며 이들을 지휘하는 장교로는 수색부대의 장교로 보이는  험상궂게 생긴 장교가 지휘를 했는데 몹씨 거칠어 보였으며 용감무쌍한 인상을 받았다 장교들도 계급장을 모두 떼어내거나 위장한 상태라 구분이 좀 어려웠다 특히 어둠 속에서는. 그랬다. 설상가상으로 마침 가을비까지 내려 흘러내린 빗물이 판초로 덮기는 했지만 참호를 무릅부위까지 채웠고 모든 소리를 죽여야했기에 물을 퍼낼수 없어 그야말로 흙탕물 속에 몸을 담구고 있었기에 온몸이 추위와 한기로 소름이 돋아났었다

 이따금씩 밝은 조명탄이 터지고 진격하던 수색대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사격을 퍼붓는 총성이 12시 방향 전방에서 요란하게 들려왔다

우리들도 에스앰지 기관단총과 칼빈 투 총신의 안전장치를 풀고 사격자사세로 명령을 기다리며 바짝 긴장하다 보니 추위 같은건 느낄 틈이 없었다.

이윽고 수색대와 적들과 사이에 총격전이 격열하게 벌어졌고 총알이 바위에 튕기며 일어나는 불꽃이 요란한 가운데 박격포탄과 로켓탄이 집중적으로 바위산 부근에 퍼부어?다.

나중에 살펴본 결과로는 그 바위산이 무수한 포탄을 맞아 형태를 못 알아볼 정도였으니 얼마나 치열하게 탄약을 퍼부었는지 상상이되고도 남는다.

결국 작전개시 약 2시간만에 전투상황은 끝나고 적병(무장공비로 발표)5명 사살, 1명 중상 체포 후송중에 사망, 노획무기 수류탄, 실탄, 비상식량, 지도, 무전기, 권총 기관총  이렇게 일망타진되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 피해는 조병옥 소위와 서의철 하사가 전사하고 부상병이 몇 명있었으나 가벼운 부상이었다.

적군들은 무장공비들로 건너편 감악산 루트를 통해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입하려던 공비라하였다. 아마도 이들은 청와대를 급습하려던 124군 부대 에 속한 잘 훈련된 공비들로 추정이 된다,

당시의 신문에는 이 사건을 1단 4행정도 약초꾼을 공비로 오해하여  단순 오인사살한 것으로 은폐보도가 된바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 당시 김상기 교관과 김상기 교관의 피교육생이던 서이철 하사의 시신이 봉안된 막사에서 밤을 세우며 고인의 넋을 달랬었다.

나중에 전사자들의 영결식이 지금의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서이철하사는 가난한 농촌에서 부모없이 자란 고아로 유일한 피붙이이던 외삼촌되는 농부가 와서 훈장을 받으며 슬피우는 장면을 목격하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게 떠 오른다.

조병옥 소위는 서울 창신동 사람으로 육사를 졸업하고 막 소위로 임관되어 원자교육반에 차출되어 온 젊은 신참소위였다.

이렇게 해서 당시 나는 그 전투 상황일지를 작성하여 결재를 올리는 과정에서 연애편지를 잘 쓰더니 작전일지도 잘 쓴다면서 부대장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은바 있다

그 작전일지는 지금 육군본부 전사편찬실에 기록으로 보관되어있을 것이다.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어유지리에 소재한 어유중학교에서의 나의 미스터리에 대한 추적은 결국 나 자신의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다웠던 날의 추억으로 점철된 기억의 빛바랜 엘범이다

이날 점심식사를 함께하려 김성로 교감선생님의 차로 임진강변을 달리면서 나는 분명히 레테의 강물을 보았다

당시의 파카교와 화이트교 다리 아래로 흐르는 망각의 세월에 오버랩되어  임진강물은 그날과 변함없이 역사의 시간을

실러나르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군 작전지역으로 백학마을에 거주하는 민간인들 이외에는 이 길을 통과할 수 없었던 길을 지금은 자유롭게 민간 차량이 마음데로 지역경제와 문화의 속성을  실어나른다

임진강 파커교 다리 아래서 고운 조약돌을 주워 담으며 우리들 젊음의 한때를 유영하던 곳 임진강

이 강에서 나는 <표정의 의미>라는 시를 써서 공모에서 당선되는 기쁨을 안게되었고 유경환 시인(언론인, 교수, 시인)은

장편 서사시 ,임진강>을 창작했으며 김상기 교수(미국 버클리대 석학교수)는 인생과 철학의 심오한 미로를 더듬고 있었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민통선 안에 있던 자유의 마을 이 나라의 6.25라는 민족상쟁이 만들어 낸 백학이라는 마을도 그대로

지금 그 자리에 있다.

연천, 전곡방향으로 가는 군사작전도로에서 달리는 군용트럭 뒤로 뽀얀 먼지가 꼬리를 무는 장면은  어느 전쟁영화에 나올법한 한 장면으로 선연하게 떠 오른다.

그랬다 여기 어유지리에서 있었던 이야기 자체는 내 생애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회상이라는 이름의 소설적인 인자를 가지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빛바랜 기억들을 떠 올리면서 도저한 무개의 낭만까지를 추억해 본다.. 


지금까지 나는 여유중학교 방문을 통하여 나의 50년동안 잃어버렸던 시간에 대한 기억과 의식적 추억의 교차환기에 의해 현재에서 과거로 향한 잊지못할 추억의 재구성을 해 보게 되었다. 따라서 나의 이러한 시말의 증언은 지금 그 자리에 위치한  어유중학교에 얽힌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데 작은 기여가 될 것을 상기해 본다.

다시 한번 회상하며 과거와 현재의 자리의 비교를 통해 보건데 큰 것으로는 교육대 부대와 중학교라는 교육시설의 일치성과 관사가 있는 자리에 당시에도 내무반이라는 숙사가 있었다는 공통점 등 서로 비슷한 환경에 대한 대비를 재미있게 해 본다.

당시 이곳에 살던 사람가운데 세계적인 학자가 있었던 만큼 이 자리에서 수학하고 있는 현재 서른 아홉명 학생들 가운데 반드시 사회와 국가와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큰 별이 태어날 것을 예감해 본다.

어유중학이여!  영원하라!.      (2008년 4월 8일 새벽) 

 

                                                좌로부터  이세종, 김성로, 손소운, 이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