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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글/그림과 시(picture poem)

혼자가 아니네/심춘보

 

혼자가 아니네

  시 : 심춘보 / 그림:김성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자리에 있네 그들은 없어졌네 한지리에 있으므로 없어지고 없어졌으므로 함께 있네

 

담벼락에 매달린 담쟁이넝쿨 가을날 오후 환한 햇살을 견인하고 있네 발갛거나 노란 잎새들, 처마그늘 아래

주황색 벽을 싸고 있네

 

둘이 만나 이루는 건 둘 다 있음. 둘 다 살아있음. 담벼락이 숨쉬고 있네 담쟁이 넝쿨이 제 길을 가고 있네

 

그러나 둘이 있으므로 둘 다 없음. 담쟁이넝쿨도 없고 담벼락도 없음. 담벼락은 이미 담벼락이 아니며 담쟁이넝쿨은 더 이상 담쟁이넝쿨이 아니네 담벼락에 붙은 붉은 담쟁이넝쿨. 담쟁이넝쿨이 붙은 담벼락이 있을 뿐이네

 

그런데 이상하게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들은 고스란히 살아 있음. 담쟁이넝쿨은 담쟁이넝쿨이네, 그 찰나를 비집고 흐르는 바람 한 올 담쟁이넝쿨이 붙은 담벼락이 숨쉬고 있네 담벼락에 붙은 담쟁이가 제 길을 걷고 있네 담쟁이넝쿨이 붙은 담벼락과 담벼락에 붙은 담쟁이넝쿨이

새로 태어났네

 

담쟁이넝쿨은 담쟁넝쿨대로 한 생명, 담벼락은 담벼락대로 한 생명, 둘이 만나 또 다른 한 생명, 아, 태어났네 함께 살아 숨결 벅차네 하나 된 선율이 어울리네 둘이 만나 홀로 되어 외로워지네 환해지네

 

혼자가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