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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박정은)/단편소설(박정은) novel

꽃이 있었지 1

 

꽃이 있었지-1                


                                      꽃이 있었지 (1)



박정은

 

 


망막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어떤 빛에 이끌려 그녀는 눈을 떴다.

욕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날카롭게 각이 선 신경줄을 팽팽히 잡아 당겼다. 수도꼭지를 확인하고 겨우 잠들었었는데 욕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정체모를 빛과 함께 그녀를 잠에서 끌어 올렸다.

빛은 머리맡까지 가득 쏟아져 들어와 있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한 몽환의 세계처럼 낯설고 신비로운 빛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꿈을 통해 갑자기 이상한 세계로 여행와 있는 듯 하였다. 그 신비한 느낌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은은하고 조용히 물결치는, 그러면서도 마음으로 충분히 느껴지는 그런 빛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문의 손잡이를 잡고 긴 호흡을 했다. 순간 그녀가 겪어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세계로 영원히 끌려가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일어 잠시 멈추어 섰다.

이윽고 문을 열자 청남빛 하늘에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의 둥근 달이 그녀를 맞아 주었다. 은은하게 끌어 오르는 달빛은 맑고 청초했다. 그녀는 한참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팔월 대보름으로 가는 달은 산달을 앞 둔 임부의 젖가슴처럼 부풀어 올라 지상의 모든 사물들을 감싸안고 그러고도 모자라 모든 것들의 심상에까지 도달하여 은은하고 부드러운 혀로 핥아 주었다.

달빛 아래서 그녀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가 옷을 하나씩 벗을 때마다 그녀의 크림색 살갗은 달빛속으로 증발되어 조금씩 지워져 갔다.



             *            *             *           *


오층계단으로 오르는 길은 어둡고 적막했다.

오후 늦게 외출을 했다가 밤 늦게 돌아오니 사위는 삶의 수레를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아가리를 벌린채 죽은 물고기처럼 누워 있는 아파트 앞에서 그녀가 올라야 하는 오층 꼭대기를 보며 그녀는 길게 숨을 쉬었다. 이 곳 저곳에 나부끼는 현수막이 밤의 적막을 깨고 그녀에게 빨리 오르길 재촉하는 듯했다. 그녀가 올라야 하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재개발로 철거를 앞두고 있는 주공 아파트는 혼란과 체념과 방기로 일상의 삶이 흔들린 채 여기 저기 무질서로 채워져 있었다.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하루 하루 불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가난한 세입자들, 무엇 하나 건질 것이 있나 이곳 저곳을 뒤지는 고물 장수들, 떠날 날들을 며칠 앞두고 미래의 삶에서 필요 없는 것과 필요있는 것들을 구분하여 무단방출하는 사람들이 뒤엉키어 그녀가 오층 꼭대기에 오르는 것은 장애물 경주와도 같았다.

이직 갈곳을 정하지 못하고 하루 하루 불안한 마음으로 살고있는 가난한 세입자들, 무어라도 건질 것이 있나 이곳 저곳을 뒤지는 고물장수들, 떠날 날을 며칠 앞두고 미래의 삶에서 필요없는 것과 필요있는 것들을 구분하여 무단방출하는 사람들이 뒤엉키어 그녀가 오층 꼭대기에 이르는 것은 장애물 경주와도 같았다.

열평 남짓한 작은 아파트는 재개발이라는 희망을 안고 낙후한 시설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견디어 왔었다. 모든 것은 부식되고 훼손된 채 방치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남아있는 것이 고통이었다. 영세민인 세입자와 주거해 본 적이 없는 소유주와의 긴 싸움 끝에 재개발이 결정되고 치열한 수주 경쟁에서 이긴 시공사와 재개발 추진위원들 간의 추문이 뒤이어 터져 나오며 경찰과 세무서와 구청의 공무원들이 조사를 하는 통에 공사는 오리무중에 빠져든 상태였다. 하루에도 수십대씩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이사행렬이 이어지는데도 온통 벽에는 붉은 스프레이로 그린 그들에 대한 고발들이 하루마다 다른 내용으로 등장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고급 아파트를 나온 그녀는모두들 떠나려 안달하는 그 곳으로 달랑 가방하나만 메고 찾아들었다. 이미 오래전에 주거용에서 용도 폐기하여 버려졌던 친구의 재산 증식용 아파트였다. 공사가 시작되면 곧 떠나야 하는 그 곳을 거꾸로 숨어들 듯 이사온 그녀에게 그 곳은 너무나 마땅한 곳이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둘 경황이 없는 사람들 속에서 자유로왔다.

이주민들이 함부로 버려두고 간 잡동사니들로 가득차 있는 재개발 아파트는 쓰레기 하치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계단을 오르는 일도 힘들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앞을 지날 때 느껴지는 고요와 적막은 오층에 다 오를때까지 섬찟했다. 특히 늦은 밤 그곳으로 돌아 올때면 거기 누구 없어요, 하고 외치고 싶어졌다. 절해고도의 조난자같은 적막함과 언어소통이 되지 않는 이방에서의 단절감이 매번 그녀의 등을 후려쳤다. 외출해서 돌아올 때마다 뒤쫒아오는 누군가를 피하듯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밖의 위험으로부터 집안으로 몸을 숨기려던 그녀는 그러나 더 큰 적과 마주할 때가 많았다. 검은 동공처럼 열린 그녀의 집은 숨을 멈출 듯한 적막과 고독이라는 치명적인 독을 품고 곧 잘 그녀를 기습해 왔다. 늘 낯설기만한

이 곳에서 그녀는 적으로부터의 기습에 대비해 최소한의 표면적으로 몸을 줄인 채 남은 시간들을 견뎠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온 뒤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챌까봐 전등도 켜지 않은 채 어둔 실내를 더듬거리며 소파를 찾아 그 위에 몸을 길게 뉘였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행복한지도 몰라, 라고 혼자 되뇌어 보았다. 외출복인 채로 누워 있어 밑자리가 불편하지만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있었다. 낮동안 일자리를 알아보려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탓에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잠을 청해보려는데 의식은 점점 또렷해져와 그녀를 괴롭혔다. 그 많았던 잠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잠을 청할수록 잠과는 더욱 멀어졌다.

낮에 만났던 친구는 그녀의 처지를 딱해하면서도 한심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면서 혀를 찼다.

  아직은 견딜만 하겠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보석 반지가 아직 건재한 걸 보고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파출부라도 하겠다고 나선 그녀가 값비싼 보석반지를 끼고 있는 것에 친구는 어이없어 하는 거였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 반지를 빼 주머니에 넣었다. 그 반지는 그녀가 아직 신세지고 있는 세상과의 마지막 담보물 같은 의미로 자신의 몸 가까이 두려고 그대로 끼고 있었던 건데, 친구의 눈에는 그녀가 아직도 과거의 영화를 과시하려고 한 것으로 오해한 듯 했다.

이제 자신에게 기대할 것은 사실 그 반지 하나밖에 없었다. 집을 나올 때 그녀의 몸에 있었던 패물들이 하나씩 그녀의 생존을 위해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지막 보석반지였다.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른 그녀에게 그나마 위안을 주는 그 반지를 한시도 빼어본 적이 없었다. 그 것을 남들에게 과시하거나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려고 낀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 허드레 일이라도 구하겠다고 나선 그녀의 처지와 영 안어울려 보였던 것 같았다.

행실이 좋지 못한 남편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때마다 그녀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사주었던 비싼 보석 장신구들이 이제는 거꾸로 그녀가 배반한 남편과 세상에게 그녀 자신의 과오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듯 하나씩 팔려 나갔다. 마지막 남은 이반지는 하루 앞이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한는 거였다. 또 한편으론 아직도 그녀에게 남편이 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녀가 갚아야 할 빚이 그만큼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그녀에게 살아 있음이 고통일 뿐이었다.

  대체, 정신이 제대로 박힌 여자라면 어떻게 그런 자릴 박차고 나올 수가 있다지...미친 것 아냐. 멀쩡한 여자라면 그럴 리가 없어, 미쳤지.

모두들 그녀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더구나 미천한 일자리라도 좋으니 알아봐 달라는 그녀의 부탁에 친구들마져 같은 말을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모두들 다른 곳 다른 자리 다른 생각을 한 사람들인데도 그녀를 두고 내린 결론은 한치도 다름없이 똑같다니... 그녀는 갈수록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 졌다. 이 세상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버리면 좋으련만 그녀는 그 끈을 아직 놓을 수 없었다.

그동안 그들이 그녀의 삶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보다 스무살이나 많은 나이와 다른 이보다 많은 것을 가졌던 그녀의 남편. 그에 편승하여 그녀가 누렸던 풍유로움. 그런 것들이 그려낸 그녀의 삶을 보았을 뿐... 그 그림 이면에서 그녀가 겪고 있었을 고통에 대해선 아무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녀의 고통은 풍유로움으로 충분히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오히려 물질로 보상받을 수 있는 그녀의 처지를 부러워 할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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