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있었지-2
박정은
처음 그녀가 남편과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을 떠나왔을 때 발목을 묶었던 족쇄에서 풀려난 것처럼 홀가분하고 평안했다. 몇 십년간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것 같은 자유로움이 물결쳐 왔다. 일상의 무게에서 놓여나자 그 자리를 대신해 해일처럼 잠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의 의지로서는 어찌해 볼 수 없을만큼 잠은 완강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고 어떤 감정이 이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온통 잠에 파뭍혀 지냈다.
정말 기나긴 잠이었다.
겨우 잠에서 깨어나 뻣뻣하게 굳은 빵이나 라면으로 한 끼니를 때우고 나면 마지막 한 입을 채 넘기기 전에 억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잠에 정신을 잃었다. 잠은 잠을 불렀다. 잠의 파도에 이리 저리 떠밀려 다니다가 점점 더 깊은 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가닥 의식을 붙들고, 무언가 해야지 잠만 이리 자면 어쩌나 걱정하며 잠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어느새 집채만한 파도가 덮쳐와 간신히 내밀었던 의식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촉수를 세워 의식을 일으켜보려 해도 제 힘으로는 돌기 한가닥도 스스로 세울 수 없었다. 잠은 너무나 완강했다.
잠의 와중에 남편과 아이도 만났다. 그 때 그녀에게선 어디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읽어낼 수 없을 만큼 고요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이한 표정으로 마치 남편과 아이에게 갈아 신을 양말을 건네주듯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그녀를 어렵게 찾아내어 만나러온 남편과 아이가 무척이나 당황해 했다. 가족과의 이별이 주는 아픔이나 슬픔으로 격렬한 고통속에 빠져 있을거라는 예상은 한참이나 빗나간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아픔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냉정한 표정을 짓는 것도 아니어서 그녀의 가족은 무심히 건너다 보는 그녀에게서 심한 배반감을 느껴야 했다.
기다리고 있을테니 마음이 정리되면 언제든지 돌아와요.
남편은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미리 이 말을 준비해 두었기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한 표정의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지 눈 앞의 그녀를 보고는 그런 말이 나올 수 없었다. 그저 남편은 과거의 아내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들이 보는 것처럼 그녀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 있었던 것은 사실 그녀가 잠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환과도 같은 세계에서는 어떤 감정도 그녀의 의식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자세히 그녀를 들여다 보았더라면 모두 제각기인 검은 머리카락, 흐릿한 눈빛의 그녀가 의식을 현실에 두고 있지 않음을 알았을텐데 모두들 자기 감정에 빠져 그만 그녀를 오해했던 것이다.
남편과 아이를 보내고 돌아서서 그녀는 곧장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들이 집을 잘 못 알고 찾아와 그녀의 단잠이라도 방해한 듯 그들이 돌아간 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와 잠을 덧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멀미약처럼 퍼졌던 긴 잠이 알갱이가 되어 그녀의 의식에서 일어나더니 깊게 잠든 망막을 깨웠다. 잠든 눈의 망막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빛은 잠을 걷우고 서서히 걷혀진 그 빛에 의해 또 다른 의식을 깨웠다.
그녀는 깨어나 그 이전의 의식에까지 낱낱이 조명하는 그 빛을 느끼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 자리에 허물어져 흐느껴 울었다.
잠에서 빠져나오니 가을은 이미 턱 밑에 다가와 있었다.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그녀가 잠 속에 빠져 있는 동안, 그녀가 간혹 다녔던 길을 빼고는 하얀 도료같은 먼지가 두텁게 덮혀 있었다. 생리적인 해결을 위해 혹은 생명의 연장을 위해 다녔던 길 만이 제 본래의 색깔을 드러냈다. 자신의 결손을 감추기 위해 강박증적인 청결로 무장했던 과거의 그녀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맨처음 한 일은 작은 아이를 찾아간 거였다. 아직 엄마 품이 그리울 아이 곁을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린 어미로서의 아픔이 가장 먼저 되살아난 감정이었다. 그녀는 교문 한 구석에서 다른 학부형들이 방금 나온 자신들의 아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들을 죄인처럼 지켜보았다. 아무 일 없는 듯 밝은 그들을 보려니 그녀는 아이가 그녀를 보면 어떻게 대할런지 보고싶은 마음 이면에 초조와 불안감이 더욱 그녀를 서성거리게 했다.얼마 전까지 그녀도 그들처럼 반갑게 아이를 맞이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누가 알아볼세라 움추러드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첫 아이땐 너무나 어린 그녀의 나이 때문에 떳떳한 학부형 노릇을 못했었다. 그 땐 빨리 나이를 먹어서 보통의 아이 엄마로 다른 이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날을 얼마나 손꼽아 왔던가. 서른이 얼른 되고 마흔이 빨리 되어서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길 바래고 또 바랬었는데.... 큰 아이와 터울이 한참 떨어진 작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 이젠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학부형들 속에 자연스레 섞일 수 있어서 여늬 도시 여자처럼 그들과 친구도 되고 이웃도 사귀면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바램도 얼마가지 않아 떳떳하게 아이의 하교길을 지켜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다시 구석진 곳에서 자신을 은폐하며 아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혼자 외로이 교문을 나서던 아이가 자신을 부르는 그녀를 보자 멈칫 그 자리에 서버렸다. 보지 않아야 될 무엇이라도 본 것처럼 외면하더니 울 듯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쳐 쏜살 같이 달아나 버렸다. 달아나는 아이를 따라가다가 그녀는 곧 포기하고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지켜 볼 뿐이었다. 가슴에 시린 바람이 지나갔다.
아이를 만난 뒤, 그 다음에 그녀가 한 일은 일자리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생활 정보지를 뒤지고 일간지의 구인난을 샅샅히 살펴보고 아는 이에게 취직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녀의 현주소는 비참했다.
중졸 학력인 그녀가 갈 곳은 거의 없었다. 세상의 문을 열고 나오니 그동안 가정의 보호막에 의해 감춰 두었던 그녀의 치부가 드러나는 듯 했다. 마흔도 안되는 나이에 중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녀의 척박한 이력이 세상에 낱낱이 드러나 부끄럽게 했다. 세상은 그녀가 왜 중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는지 아무런 연민도 하지 않았다. 평균의 학력에서 미달인 그녀가 그리 천박하거나 교양 없어 뵈지 않고 오히려 상류층 여자의 고상하고 귀족적인 품격을 갖고 있는 걸 의아하게 여길 뿐이었다. 자신의 뜻과 무관한, 자신의 의지가 미칠 수 없었던 소녀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던 사연이 그녀의 인생에 어떤 의미로 작용했는지 세상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노래를 좋아하는, 장래 가수가 꿈이었던 평범한 여고생인 그녀는 어느날 졸지에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을 빼앗기고 채무자들을 피해 가족들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잠적해야 했다. 그녀는 그 와중에 친지의 주선으로 가정부가 되었다. 당장 잠잘 곳도 없었던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꿈도 많았고 웃음도 많았던 어린 그녀에게 찾아온 재난은 전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주인댁 집안에 행사가 있어서 모두들 행사장으로 떠나고 홀로 남게된 그녀는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낮잠을 자게 되었다. 그 동안 해본적도 없었던 가정부일로 지쳐버릴 대로 지쳐버린 어린 소녀는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에 그만 정신을 잃을만큼 깊은 잠에 빠져 들게 되었다. 하필 그때, 마흔이 다 되도록 결혼하지 못하고 혼자 살던 그 집 큰 아들이 집에 들렀다가 흐트러진 자세로 소파에 잠든 그녀를 덮쳤다. 이 일로 그녀는 임신을 하게 되어 우여곡절 끝에 어린 그녀는 가정부에서 그 집안 며느리가 되었다. 이런 중대한 신분 변화에 그녀 의사나 의지는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녀를 제외한 타인들의 결정에 의해 그녀는 자신을 성폭행한 나이 많은 주인댁 아들의 어린 신부가 된 것이었다. 성폭행 피해자인 가정부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이 바로 가해자인 주인집 아들의 아내로 신분상승 시켜주는 것이라는 그들의 계산에 그녀의 의사가 참고될리 없었다. 아니 그들은 오히려 불행한 처지인 그녀에게 그 사건으로 전화위복의 행운을 가져다준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면서 내심 나이 많고 성격 까다로우며 바람끼 많은 맏아들에게 마음껏 무시하며 살아도 되는 가정부 출신의 그녀가 아들의 짝으로는 적당할 거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더구나 그녀가 그 집 가정부로 오기 전에는 중산층 자녀로 곱게 자랐었다는 성장배경도 그녀를 그 집 며느리로 들이는데, 또한 나이 많은 아들보다 훨씬 어린 그녀의 나이가 젊고 건강한 후손을 낳을 수 있다는 그들의 계산이 그녀를 선뜻 며느리로 들일 수 있게 했다.
그런 결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지만 갑작스런 가족해체와 이로 인한 많은 일들이 너무 한꺼번에 몰아 닦치는 바람에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다. 아니 정신을 바르게 차리고 있다해도 당시의 그녀로선 그 어떤 것에도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었다. 자신의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의사가 실종된 일방적인 그들의 결정에 거절할 힘을 갖지 못한 어린 그녀의 결혼생활은 수난의 연속일 뿐이었다. 시댁 식구들이 예사로이 그녀를 무시하고 하녀처럼 대해도 어디에 하소연 할길이 없었고 더 지독한 것은 남편과의 관계였다. 처음부터 성폭행의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왜곡된 관계에서 출발한 부부였기에 정상적일 수는 없었음이 너무나 자명했다. 그 결혼은 처음부터 그녀를 남편 마음대로 성폭행해도 된다는, 남편에게 치외법권을 부여한 셈이었다. 밤새도록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채 남편에게 시달려야 했다. 언제든 남편이 그녀를 만지고 싶거나 성폭행하고 싶을 때면 어떤 장애 없이 곧 바로 원하는 상태로 쉽게 이를 수 있도록 남편은 아무리 추운 날에도 그녀에게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밖에서는 소심하고 열등감이 가득한 남편의 해방구는 바로 그녀였다. 도덕적인 무장이 전혀 필요없는, 소유물이나 진배없는 그녀에게 남편은 밖에서 풀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를 마음껏 해소하려 들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자랐고 일방적으로 무시해도 될만큼 어리거나 바보스럽지 않은 탓에 그녀도 그들 틈에 한 사람의 가족으로 자생초처럼 자리 잡고 살아 남았다. 그 동안 시댁은 가세가 기울어져서 예전같은 권세가 조금 덜해졌고 남편은 어른으로 자라난 그녀를 조금씩 인정해 주었으며 점점 늙어가는 자신과 반대로 젊음으로 한창 피어나는 아내에게 주눅이 들어가던 참이었다. 이제 아무런 장애도 없이 그들을 태운 호화선은 다음 항구로 향해 가던 중이었다.
어느날 그녀는 그 호화선에서 뛰어내렸다. 모두들 그녀를 보고 어리석고 무모하다고 했다. 깊이도 알 수 없는 어두운 바다에서 그녀가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깊이도 알 수 없는 어두운 바다에서 그녀가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가 몸에 지니고 있었던 보석들이 하나씩 팔려나갈 때마다 그녀는 남편이 부여해 주었던 계층으로부터 한 계단씩 내려섰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반지도 언제까지 그녀 곁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얘측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루 하루 사는 것이 벅찬 하층민으로 전락해서 산다해도 그녀는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동안 불편한 남의 옷을 입었다가 이제서야 자기 옷으로 갈아 입은 듯 편안함이 이십년간 내리 눌렀던 그녀의 가슴에서 묵직한 것을 덜어냈다. 혼자가 된 이후 시시각각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