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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박정은)/단편소설(박정은) novel

꽃이 있었지 3

 

                 꽃이 있었지-3


                                                                                        박정은

 

 


그녀는 촛불을 켰다.

어디에선가 주어온 작은 탁자 위에 촛불은 그녀와 반원을 그리며 종이 위를 비추었다. 주변의 냉기에도 불구하고 연필로 정성들여 한자씩 한자씩 써내려가는 그녀의 뺨이 발그레 달아 올랐다. 비로소 자신 앞에 마주한 그 느낌 때문일까, 그녀는 우물처럼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           *           *          *


기나긴 잠이었어요.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들 사이로 언 듯 비춰진 내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그저 그렇게 흘러가보는 것도 괜찮은 줄 알았어요. 내가 누리는 안락함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 세상은 나를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들게 할거라고 생각했지요.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나는 늘 안락함 이면에 복병처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강의 반대쪽을 두려워 했지요. 행복을 가장하면 할수록 그 것과는 정반대로 언제든 나를 향해 집어 삼킬 듯 입을 벌리고 있는 삶의 또 다른 이면에 늘 불안해 했어요. 인생의 암흑같은 동굴에 한 번 빠져본 적이 있는 자만이 본능처럼 감지되는 그 전조를 애써 무시하며 살려고 했지요.

나의 욕구나 나의 꿈이나 나의 생각들... 내가 얻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선 언제나 모르는 체 해버렸어요. 바로 그런 것들이 나를 어둠속으로 밀쳐낼 거라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그 것들로부터 현재의 나를 지키려 늘 뒤돌아서 있었지요.

처음부터 시작이 잘못된 결혼이어서인지 시댁 식구들에게 하녀 취급을 당하고 남편은 걸핏하면 네가 무얼 알아 하며 무시하기 예사였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었어요. 아이들이 태어나서 조금씩 내 자리가 생겨나고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이 흐른 세월만큼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달라졌는데, 정작 내 아이들이 제 어미를 무시하려 드는 것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어미에 대한 무시와 편견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각인되어 그렇게 된 것을,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제 심정이 어떠했을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허탈하고 괴로웠던 심정을 누가 짐작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도 내 뱃속으로 낳은 아이들이니 내 허물이라 여기며 견딜 수 있었어요. 모든 일로부터 잠을 자듯 의식을 저 밑바닥에 놓아두고 가만히 눈을 감아버렸지요. 그렇게 수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어요.


그런데 봄이 시작된 어느날 당신이 나를 불렀어요. 그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지요. 그 봄 내내 시작된 정체모를 불안감이 어떤 형체를 갖고 내게 모습을 나타낸 순간이었어요. 아이들은 새 학년이 되었고 모두들 생동하는 봄의 기운에 들떠 있는데, 나라는 사람만이 어제와 다름 없이 죽은 듯 살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퍼지던 때였지요.

이런 자괴감에서 벗어나려 다른 해와는 달리 학급 임원이 된 둘째 아이 핑계로 외출을 시작 했지요. 그동안 스스로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은폐시키며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남편의 눈총도 아랑곳 않고 세상으로 나왔을 때, 당신이 내 이름을 불렀어요.

매해 봄은 오고 있었지만 그 봄은 유난히 허무와 비애를 느끼게 했어요. 처연한 봄의 빛깔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올 것 같은 나의 슬픔을 대신하고 내게서 한 해 한 해 소리없이 사라지고 있는 이 봄을 안타깝게 했지요. 봄은 늘 다시 오지만 이 봄을 보내고 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아니 다시는 이 봄으로 내가 돌아갈 수 없다는 애틋함에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했어요.

봄처럼 다가온 당신.

봄의 설레임으로 가득한 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당신.

내 몸은 서서히 낡아가고 내 마음이 그리던 삶은 언제나 저 먼 곳에 있으며, 나는 나인데 어디에서도 나를 찾을 수 없는 허무의 두께가 켜켜로 쌓여가던 그 봄에 내 이름을 불러준 당신. 이십년이 다 되도록 들어본 적이 없는 내 이름을 당신이 불러주었을 때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났어요.

그 때 내가 서 있는 곳이 온통 낯설고 내 모습이 내가 아닌 듯 했고 내가 왜 그 곳에 서 있을까 영문 몰라 두리번 거렸지요.

까페 앞에 내걸린 현수막에서 당신 이름을 보았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지나쳤었는데, 당신이 나를 부르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 앉으며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느꼈어요. 어떤 예감 같은 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당신에게로 한발짝씩 다가 가던 그 순간은 모든 것들이 움직임을 멈추었지요. 오로지 당신과 나만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였어요. 그 순간엔 우리 사이에 흐르던 공기 입자 하나하나가 미세하게 보이기까지 했지요.

나중에 생각해 봐도 어떻게 그렇게 당신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었어요. 당신 또한 달라진 나를 이 십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렇게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는지....

그 날 봄밤은 마음을 설레게 하는 꽃향기로 가득했고 당신의 흰 와이셔츠에서는 싱그러운 풀냄새가 났어요. 언젠가 맡아본 적이 있는 추억의 향기가 바로 당신이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지요. 다시 돌아가보고 싶은 시절로 나를 이끌어주던 그 향기의 정체. 당신은 그 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그 시절의 기억들을 퍼즐 조각처럼 맞추어 주며 나를 하나씩 되살려 냈지요.

  알아, 그때 네가 그렇게 말했던 거?

어쩜 그렇게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걸까요. 예전의 내가 당신의 추억 속에서 나왔을 때 내 모습은 세월에 도굴 당하지 않은 너무도 순수한 나였지요. 당신이 아니면 정말 나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짐작도 할 수 없는 옛 시절을 어제인 것처럼 또렷이 그려내는 당신은 마치 망각의 숲을 헤치고 온 나의 님프였어요.

유치원 때부터 단짝이었던 당신은 참 노래를 잘 불렀지요. 목울대의 핏줄을 도드라지게 한 껏 열성을 다해 동요를 부르던 어린 당신의 목소리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어른들은 당신보다 못하지만 나의 노래에도 후한 점수를 주며 당신과 듀엣으로 부르길 원했지요. 좋은 화음을 이루었던 당신과 내 노래가 끝나면 당신은 쑥스러운 마음에 곱게 빗어넘긴 내 머리꼬댕이를 잡아당겨 나를 울리곤 했었지요. 나중에 꼭 크면 꼭 같이 노래하라고 했었는데 사춘기를 지날때까지 옆집 친구로 단짝으로 지냈던 당신과 어느날 이별의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었는데... 그 곳에서 당신의 노래를 듣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와 뛰쳐나오고 말았어요.

집으로 돌아오니 나이많은 남편과 믿기지 않을 만큼 커버린 아이들이 모두 낯 설게 느껴졌어요.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저들은 누구일까,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데 하는 마음이 내내 떠나지 않았어요.

그 곳에 다시는 가지 말아야지 하는 이성적인 경고와 빨리 그 곳에 가고싶다는 욕망 사이를 오가며 어느새 당신이 노래 부르는 까페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은 얼마 뒤였어요.

두 어깨를 올리고 머리를 뒤로 젖혀진 모습으로 노래에 열중하던 당신의 모습을 본 순간 나의 가슴은 피돌기가 과부화를 일으킨 것 같은 설레임으로 터질 것 같았어요. 창 밖의 나무들이 자라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 당신의 노래는 내 영혼을 일깨웠어요.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삶의 어두운 저 편에서 희망도 꿈도 추억도 버리고 살았던 나에게 당신의 감미롭고 그윽한 노래는 나를 삶의 이편으로 흘러가게 했어요.

갑자기 어른 세계로 들어간 나는 스무살도 없었고 스물 다섯 살도 없었지요. 청춘이 실종된 나에게 당신을 만난 것은 잃어버렸던 그 시절을 복원하는 일이었고 끊어진 필름을 다시 잇는 일이었어요. 당신을 통해 스무살도 되었고 스물 다섯도 되었지요.

꽃잎이 분분히 내리던 밤에 당신을 처음 만난 이후, 푸른 잎새가 무성해지던 어느 날부터 당신과 나는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어쩌지 못해 모텔을 전전하며 사랑을 나누게 되었지요. 당신과 있는 곳은 어디든지 금새 나와 당신의 사랑을 담아내는 아늑한 곳으로 변했지요.

내가 당신의 알몸을 만질때마다 나는 잊었던 나를 찾는 기분이었어요. 내 나이에는 이런 피부를 가졌구나. 내 나이에는 이렇게 말하는 구나. 내 나이에는 이런 추억이 있구나. 내 나이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나이 많은 남편과 살면서 실종되어버린 내 또래의 꿈과 육체와 습관과 걸음걸이 같은 것들을 가까이 바라보고 알게 되는 것이 얼마나 새롭던지요. 아니 어찌나 슬프던지요. 당신이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귓볼에 입술을 갖다대고 내 등을 부드럽게 끌어 안아주었을 때 여자에게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마음 깊이 깊이 느꼈답니다.

아내의 몸에서 팬티도 다 벗기지 않고 일방적으로 덮쳐 누르며 자신의욕구만 채우는 남편만 알고 있었던 내게, 기분이 어때 하며 내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는 당신의 눈길 때문에 당신의 몸이 들어오기도 전에 황홀하였습니다. 늘 보고 싶었다고, 언젠가 한번 꼭 만나고 싶었다는 당신의 고백에 가슴이 떨려 오기도 했습니다. 나를 고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본지가 얼마만이었는지 당신의 고백을 듣는 순간 당신의 사랑에 숨이 막혀 왔습니다. 당신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늘 당신과 함께 하고픈 욕심이 자꾸 커져 왔습니다.

왜 우리는 매일 만날 수 없는 걸까요. 왜 우리는 같은 침대에 누워서 아침을 맞을 수 없는 걸까요. 왜 우리는 저녁밥을 지어 먹으며 편안하게 밤을 맞이할 수 없는 걸까요.

여름은 우리의사랑을 확인해 주며 우리 주변으로 쏜살같이 지나 갔습니다. 당신이 노래를 부르는 까페마다 숨어들 듯 구석에 자리하고 앉아 당신의 노래를 들엇습니다. 당신의 노래 속에 숨겨진 우리의 사랑이 때론 부드럽게 때론 열광적으로 뿜어져 나올 때 가슴 저 밑바닥까지 울려오는 감동에 몸을 떨었습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사랑하는 당신과 살고픈 갈망이 나날이 커져만갔습니다. 청춘을 앗아간 남편과 습관처럼 이어 오던 메마른 결혼 생활이 무의미해졌음을, 이제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떠나 왔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나날이었지요.

결벽증이라 할만큼 매일 닦아내고 씻어내던 집안이 흐트러졌고 더러움이 쌓여 갔지요. 멍한 표정에 밖에만 눈을 주며 잦은 외출을 일삼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을텐데 남편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에 나는 더욱 숨이 막혀 왔습니다. 남편은 그런 계산까지 하고 있었을테지요. 자신의 침묵으로 숨이 막힐거라는.

당신은 당신대로 괴로워 하더군요. 무명가수로서 힘든 당신에게 가정의 안락함을 주었던 당신의 헌신적인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괴롭다는 당신의 고배에 저도 또한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되돌아 갈 수 없게 멀리만 가는 당신과 나는 더 이상 그대로 있을 수 없었어요.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이 어디론가 떠나자는 제의를 했었지요. 아내를 속이는 일도 아내에게 사실을 말할 용기도 없다며 차라리 어디론가 숨어버리자는 당신과 어디론가 출구를 찾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우리는 현실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약속시간 약속 장소를 정한 우리는 너무나 모든 것을 빨리 하려고 덤벼들었지요. 용의주도함 보다는 빠른 도피를 원했기에 몰래 집을 나가려던 나는 남편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답니다. 독선적이고 일방적이었던 남편은 의외로 조용하게 나를 막아섰습니다. 한마디만 듣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지요.

  그동안 미안했다. 붙잡지 않겠다. 이제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하지만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와라.

등을 돌린채 낮게 읊조리는 늙은 남편의 그 한마디가 나를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완강했거나 폭력적이었거나 했더라면 그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올 수 있었을텐데 평소의 남편답지 않던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던 거지요. 주저하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더 이상 망설이면 안될 것 같아 마음을 다잡아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쓸쓸한 표정의 남편이 가슴을 애리게 했지만 당신을 포기하는 것은 더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에 눈을 질끈 감고 매정하게 돌아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가보니 당신은 없었습니다. 한 두 시간 늦었을 뿐이었는데 당신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 사이 당신이 왔다간 것인지 어쩐지도 전혀 알길이 없었지요. 혹시 약속 시간을 잘 못 안건 아닐까, 아님 장소에 혼선이 있었던 것일까, 아님 당신이 무언가 착각을 해서 어긋난 건 아닐까...... 정말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어요.

만약 당신이 먼저 기다리다 갔다면 당신이 얼마나 당황했을까. 얼마나 실망했을까.... 안타까움으로 당신을 찾아 나섰지요. 당신에게 전화도 되지 않았고 당신이 노래 부르던 까페에서도 당신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당신을 찾아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건만 어디에서도 당신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당신과 만나기로한 그 장소에 매일 그 시간이면 하염없이 서 있기도 했지요. 얼마 뒤에야 오리무중인 당신의 소식을 그저 기다릴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당신에게서 먼저 소식이 오기를 목을 늘여 기다렸지요.

여관을 전전하면서도 혹시 당신과의 끈이 끊어질까 두려워 멀리가지 못하고 당신이 연락할 수 있는 당신의 반경 안에서 늘 맴돌았어요. 그렇게 당신 소식을 기다리던 내게 하루 하루는 입안이 타들어가는 고통이었지요.

기다림에 지쳐가던 어느날 내 처지를 알게된 친구가 재개발을 앞둔 자신의 빈 아파트를 주선해 주어 이 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도 당신에게서 혹여 연락이라도 올까 하는 기다림은 단 하루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선 어떤 소식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쳐버릴대로 지쳐버린 지금 이제 이 곳에서도 오래 머물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재개발 협상이 제법 진척이 되어가는 요즘 여기서 나가야 하는 그날이 다가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지요.

내 소재지를 어떻게 수소문 했는지 남편은 가끔 내 생사여부를 확인하려는 듯 문을 두드려보고는 내 응답을 듣고 가기도 하고 너무 힘들면 잠시 집에 들러 쉬었다 가라는 메모를 남기고 돌아가기도 합니다. 아이들 소식도 넌지시 전하면서 다시 돌아 오면 아무 것도 묻지 않을테니 예전처럼 살자는 회유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남편 자신은 새로이 결혼해봤자 처녀일리도 없고 하니 어짜피 결혼한 적이 있는 여자와 결혼 할바에는 아이들 어미인 나를 선택하는게 더 났다는 솔직한 심정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에게 처녀를 유린 당하고 청춘을 희생한 아내에게 그렇게라도 죄책감을 씻고 싶을만큼 남편은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그러나 이제 되돌리기엔 내가 너무 멀리 왔음을 남편은 알지 못합니다. 나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에 대한 사랑을 안고 다른 이와 살 수 없음을, 아니 당신이 행여 나를 찾을지도 모르므로....


얼마전 당신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무척 아파서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고요. 다행이 아이는 좋아졌고 당신도 노래를 다시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산다는 그 곳에 가보았습니다.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산책나온 당신과 당신의 아내를 보았습니다. 약간 수척해진 당신과 당신을 향해 그윽한 미소를 보내며 당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당신의 아내. 나는 가슴이 멎은 듯 그 자리에 서서 당신의 아내를 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내 대신 그 자리에 내가 서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늦은 잠에서 깨어난 당신의 뒤엉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당신의 아내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아주 평안한 얼굴이었습니다. 무명가수 남편의 작은 수입으로도 알뜰하게 가계를 꾸리며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살아가는 당신의 착한 아내와 그런 아내를 사랑하는 당신의 모습을 읽어내리면서 어찌나 가슴이 쓰라리던지요.

멀리서 당신을 지켜보고 돌아오던 그 날 이후, 당장 당신에게로 달려가고픈 충동과 당신과 당신의 아내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그림을 지켜주고자 하는 의지가 서로 싸우는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택했습니다. 당신이 가진 것들을 지켜주기로.


하염없이 슬프기도 하고 하염없이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기에.


당신을 만나기 전에 내 존재는 저 혼자 피고 저 혼자 지는 들꽃이었지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아무도 알아보는 이 없는 들꽃, 너무 작아 세상이 눈치채지 못하는 아주 작은 들꽃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존재를 알리려 몸을 흔들어도 잘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들꽃이었지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내게 꿈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렸지요. 당신을 만난 후에야 나에게도 아름다운 꿈이 있었음을 기억해냈지요. 영영 잃어버렸을 꿈을 일깨워준 당신.

나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당신이란 다리를 건너서 내가 무엇을 좋아했고 싫어했는지 내가 어떻게 살고 싶어했는지 어떤 느낌니 있었는지 알게 되었어요.

나로부터 멀리 떠나와서 나를 찾을 길이 없었는데... 세상으로부터 도굴 당한 나를, 풍화되고 침식되어 변질된 내 모습만 기억하는 사람들로부터 순수한 내 모습을 복원시켜준 당신을 만나 사랑할 수 있었기에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나로부터 도굴 당하도록 방조한 나 자신에게 나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당신.

그런 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으니 나 얼마나 행복한지.


사랑하는 당신, 이제 촛불이 다 타들어갑니다.

촛농이 초의 옹벽을 쌓아오길 수 십번, 초의 생명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신과의 아름다운 추억들.

꿈이 아니었을까 싶을만큼 당신과의 뜨거운 사랑이 희미해질 날이 오더라도  나는 이제 이름없는 들꽃이 아니었음을, 당신과의 사랑으로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꽃이었음을.


                  *           *         *          *


여자는 달빛 속에서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느릿느릿 목욕을 시작했다.

그녀는 알몸이 차가운 물속에서 느리게 유영했다.차가움이 살 속 깊이 느껴졌으나 그녀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투명한 달이 그녀의 우유빛 알몸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그녀는 물속에 온몸을 담그고 일어나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아파트는 얼마뒤에 재개발에 들어 갔다. 그 자리에 새로운 고층 아파트가 생겨났다. 그녀의 소식을 알아보려 어떤 남자가 그 곳에 들른 적이 있었으나 아무도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자 아무도 그녀의 소식을 물어 오지 않았다.


세월은 모두에게 그녀의 존재를 망각하는 알약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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