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 꽃(2)
박 정 은
명옥이 컵이 담긴 쟁반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섰다가 현관과 중문 사이의 공간에서 죽어있는 흰순이를 발견했다. 조금 전까지도 살아있던 흰순이가 어미와 동기들 곁에서 기어 나와 최대한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조용히 삶을 마감한 것이다. 혹시나 해서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보았지만 미동도 않고 체온까지 차갑게 느껴졌다.
죽음을 확인한 순간 명옥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종전까지도 목숨이 붙어있을 때는 안타깝고 슬픈 마음으로 흰순이를 쓰다듬어 주었는데, 이제 죽었다 생각하니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두려운 대상이 되었다.
장갑을 끼고도 모자라 집게로 흰순이를 집어서 신문지 위에 놓고 둘둘 말아 들고나서는데 어미가 명옥을 쫓아오며 흰순이를 내놓으라고 컹컹 짖었다. 펄쩍 펄쩍 뛰어오르는 기세가 금방이라도 신문더미를 채갈 듯 야단이었다.
죽음을 몰랐을까. 어미는 흰순이가 죽기 얼마 전까지도 잘 거들떠보지 않다가 죽어서 묻으려고 내놓으니 제 곁에 두겠다고 난리를 쳤다.
단풍나무 밑을 조금 파 흰순이가 든 신문더미를 통째로 넣은 후 흙을 반 삽 정도 퍼 덮었다. 겨우 반삽에 이제 흰순이는 세상에서 없어졌다. 십일간의 생명을 붙들기 위해 힘센 오빠들과 함께 어미젖을 갖고 다투었나보다.
마지막으로 흰순이의 무덤 위에 돌을 올려놓았다.
차라리 흰순이가 행복하구나 하는 자조가 명옥도 모르게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너는 떳떳하게 가까운 곳에 묻힐 수가 있으니….”
명옥은 흰순이를 묻고 돌아서며 죽은 첫 아이를 생각했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이 였다. 낳은 첫 날엔 남편이 자신을 꼭 닮았다고 좋아했다. 정작 명옥이 본 둘째 날은 경악을 주는 모습이었다. 다운증후군의 증세가 역력한, 눈썹과 눈썹사이가 유난히 멀고 코가 납작하여 기형적인 얼굴 모습에 손가락이 두 마디뿐인 아이는 호흡곤란 증세까지 생겨 인큐베이터에 넣어졌다.
의사는 살아나도 평균수명이 일반인의 반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명옥 부부는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멀쩡한 대낮에 날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우리가 무얼 그리 잘못했기에 이런 재앙을 주는지 하늘을 향하여 원망과 탄식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염색체 수가 하나 모자라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 그런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명옥 이었다. 더구나 한 달에 한번씩 규칙적으로 산전진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 때마다 의사에게서 단 한번도 태아가 정상이 아니라는 소견을 들어보지 않았으므로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의사도 명옥처럼 태아가 정상아가 아닐 거라는 의심을 한번도 하지 않았나 보다. 그 아이는 의사의 직무유기로 세상 밖을 구경하게 된 셈이었다.
단지 그 뿐이었지만 그건 평범한 명옥 부부의 삶에 커다란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자궁 안에서 이상이 발견되었더라면 일찍이 제거되었을 아이, 살아서 온전한 달수를 채워 자궁 밖으로 나온 게 커다란 잘 못 인양 모든 사람들에게 준 충격 때문인지 숨을 제 스스로 쉬지 못했다. 비정상적인 아이를 구태여 인큐베이터에 넣어서 생명을 안정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정상인들의 살의를 알아버렸는지 아이는 곧 죽었다.
그건 모든 이의 바램이었다. 모두가 그 애의 죽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어미인 명옥 자신조차도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그래도 살았으면 하는 마음 보다 더 컸음을 두고두고 아프게 후회했으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정상인이라 일컫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그 아이는 어차피 살아가기 힘든 존재였으므로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팔천 사백만 번의 윤회 끝에서 단 한번이 모자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막 인간으로 진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성장시키기 위해 자신이 그들 진화의 징검다리가 되려고 했을까….
명옥은 산후 후유증으로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몇 날을 세우며 낯모르는 이들 손에 들려 무덤도 없이 묻혀 사라지고 만 그녀의 아이를 잊으려 애를 썼다. 다시 다음 아이를 가질 때까지 남에게 내색도 할 수 없는 번민으로 밤을 지새는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그렇지만 명옥 부부에게 그런 잘못된 생명이 그 애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현대의학으로도 정확하게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비정상적인 아이를 잉태하고 지우고 하는 반복된 비극을 겪으면서, 수수께끼 같은 덫에 갇혀버린 셈이었다.
임신초기만 되면 염색체 검사로 뱃속의 태아가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검열을 했지만, 번번이 그 아이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명옥의 자궁 안에서 채 만들어지지 못한 미완의 생명체로 그 생을 마감해야하는 슬픈 운명을 갖고 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명옥 부부에게 일어나는 그 비정상적인 비극에 대해 아무도 해명해 주지 못했으며, 단지 지구상의 단 몇 퍼센트라는 불행의 화살을 맞은 재수 없는 사람들일뿐이었다.
아이는 지워지고 또 지워졌다.
지우개로 지우듯 명옥의 뱃속에서 지워버린 아이들, 그리고 연속된 낙태로 인해 쇠약해진 명옥의 육체, 명옥 부부를 둘러싼 어둠 속의 분열과 냉기…….
그들에겐 변화가 필요했다.
보편적인 삶의 견본 속에 들어있는 ‘자식’이란 의미를 지우기 위해, 부부만의 새로운 삶의 양식을 위해, 십 년이 넘도록 살아온 도시의 아파트를 버리고 조용한 도시근교 산자락으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거의 노년층으로만 구성된 시골 마을에서 명옥은 자신의 불행을 숨길 수 있었다. 아니 수면 아래로 문제를 밀어 넣고 고요함을 가장한 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도심 아파트단지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젊은 부모와 아이들로 이루어진 정형화된 가족 구성원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니까, 명옥은 이 시골 마을에서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명옥이 지워버린 아이를,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이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살아있으면 그 아이처럼 풀도 뜯어먹고 개밥도 먹고 다닐, 뱃속에서 지워버린 아이를 이곳에서 문득 마주쳤을 때 명옥은 전율했다.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그들은 이미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다고 뱃속에서부터 죽임이 정당화 된 존재였는데 그들이 아니 그 애가 버젓이 살고 있다니....
명옥이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게 된 것은 이 마을로 이사온 지 한 참 후가 지나서였다.
십일월초 마을 뒷산의 고운 단풍잎들이 퇴색해 갈 즈음 이 시골 마을로 명옥은 이사를 왔다. 시골마을로 이사오면서, 여러 가지 들리는 풍문으로 도회지 사람이 같이 섞여서 살 수 없을 만큼 텃세가 심한 곳이 시골마을이라는, 우려 섞인 충고 속에 생각해 낸 것이 이사팥떡 이었다.
이사왔다는 인사도 드릴 겸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잘 도와달라는 뜻이 담긴 팥떡을 돌릴 때 명옥은 전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누구 하나 빠질세라 마을 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안내해 주던 옆집 아주머니는 산자락 끝에 자리한 초라한 슬레이트집 앞에선 그냥 지나쳐 갔다.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오는 것을 보면 사람이 안에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도, 그 아주머니는 “집에 사람이 없어.”하고는 다른 집으로 향했다. 명옥은 불빛이 비치는 그 집 앞을 지나치면서 불을 켜 놓고 외출했나보구나 정도로 짐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겨울이 닥쳤다.
겨울 동안 시골마을에선 동면하는 짐승뿐 아니라 사람들마저 집안에 웅크리게 했다. 달리 갈 곳도 없는 명옥은 겨우 내내 집안에 틀어박혀 하얀 눈이 덮인 거실 밖 풍경에 눈을 박고 지냈다. 그나마 명옥의 집이 산 밑 동네의 제일 앞에 위치하고 있는 바람에 거실 창으로 어떤 장애물도 없이 아주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어서 명옥에게 겨울의 무료함을 달래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끔 눈이 오는 날이면 명옥의 집 앞으로 낯선 그녀가 아이를 업고 가거나 아이의 손을 붙들고 걸어가곤 했다. 그때마다 명옥은 정물화처럼 무심히 보면서 ‘그때 떡을 주지 못한 그 집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 때 그녀와 아이를 보면서 정상이라거나 비정상이라거나 하는 분별은 생각도 못했다. 어쩌면 사람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한 마을에서 즐겁게 소리치며 왔다 갔다 하는 그들 모녀만이 유일한 생명체처럼 느껴진다는 정도는 해보았을 것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명옥이 동네사람들과 인사치레하고 지낼 즈음, 그들끼리 비밀스레 건네는 말속에서 언뜻언뜻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게 되었다. 이리 저리 그들의 말을 퍼즐 조각 맞추듯 맞추어 보면, 그녀는 큰동서가 일이나 마음대로 부려먹으려고 아랫녘에서 데려와 시동생과 짝을 지워 준 바보여자이며, 그녀의 남편은 약간 지능이 떨어진 청소부이고, 그녀의 시댁형제들은 같은 동네에 살며, 밥은 열흘에 한번 정도 한꺼번에 많이 해두고 그 것으로 열흘쯤 버티며 산다는 정도였다.
명옥이 그녀와 처음 맞닥뜨린 것은 그 겨울이 지나서 봄을 맞을 때였다. 모처럼 대문을 활짝 열어 젖혀 널따란 마당에 뜨락인지 텃밭인지 구분도 없이 뾰족뾰족 돋아나는 잡풀들을 캐내고 있었다.
새싹들은 어떤 것이나 가냘프고 어여뻤으며 어린 새싹들에게서 컸을 때의 억세고 질긴 모습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뽑아야 될지 망설일 만큼, 연약하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돋아나는 싹들을 보며 ‘이건 과연 어떤 풀의 어린 모습일까’하고 상상해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 연약한 싹들이 가시 달린 넝쿨이 되거나 대나무처럼 통이 굵은 풀이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단지 마당에 풀이 너무 많구나 싶어 마지못해 뽑아주는 정도였다.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에 엎드려 풀을 뽑고 있을 때면 봄빛을 받아 따스해진 등처럼 날이 서고 강박관념에 쫓기 듯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봄눈 녹듯 녹아 내려 가슴속까지 따스해져 왔다. 그런 시간들이 좋아 틈만 나면 명옥은 모자도 쓰지 않고 마당에서 풀을 뽑았다.
그런 어느 날, 얼굴이 몸통보다 훨씬 큰 아이가 뒤뚱거리며 명옥의 집에 들어 왔다. 그 뒤를 이어 아이를 부르며 그녀가 들어 왔다. 그녀는 명옥의 집에 들어 올 구실을 만들어준 아이가 무척 다행스러운 표정이면서도 그런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봐 괜히 큰 소리로 아무 집이나 드나든다고 아이를 야단쳤다.
그 때 아이보다도 그녀를 보고 동네 사람들이 말하는 그녀구나 하고 짐작 할 수 있었다. 아이는 얼룩이 심해서 더러웠음에도 어린 풀이 모두 어여쁘듯이 별달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뒤따라 들어온 아이의 어미는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정신지체 장애인’이라는 분류가 확연한 모습이었다.
유난히 긴 얼굴에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얼굴피부와 억센 머리칼 속에 자리한 흰머리와 벌어진 입매, 그 사이로 보이는 성글고 기다란 이들과 찌부러진 두 눈과 쳐진 어깨…….
명옥은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등급을 매긴 사실에 깜짝 놀랐다. 누가 알려준 바도 없이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기준점이 놀라웠다기 보다는, 명옥이 낳은 적이 있던 아이가 속한 부류의 구체화된 모습을 본 때문이었다.
명옥은 그녀를 마주볼 수 없었다. 뱃속에서 지워버린 아이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기는 어떤 역한 냄새, 아니 실제로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닌데도 지레짐작으로 상상하는 냄새인지도 모르는, 그런 냄새 때문에 명옥은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는 명옥의 감정 따위엔 아랑곳 않고 말처럼 유난히 긴 앞니에 끼어있는 반찬 찌꺼기를 내보이며 사뭇 명옥에게 호감을 표했다.
불명확한 발음과 적절치 못한 단어를 반복하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명옥은 거의 토할 듯 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늘 명옥에게 와서 무엇이든 도와주려 애썼다.
명옥이 차마 동네사람들처럼 노골적으로 그녀를 대하지는 않는다 해도, 말없이 냉대를 하는 것을 알텐데도 그녀는 걸핏하면 명옥에게로 와서 그녀를 도왔다. 그녀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피해를 입는 양 온 마을 사람들이 주는 노골적인 학대를 겪어서 인지 명옥의 말없는 냉대가 차라리 그녀에게는 환대로 여겨져 그녀는 명옥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녀의 눈에는 마을사람들과 동떨어져 사는 명옥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명옥의 무반응에도 시시때때로 아이를 앞세우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명옥에게로 와서 한없이 푸념하거나, 어쩌다 외출하려는 명옥을 치근치근 붙들고선 아쉬워했다.
“성, 나 심심해 죽겄어. 언제 올 끼여.”
그녀는 명옥이 자신의 친 피붙이나 된 듯 친근하게 다가서서 돌아오는 시간을 묻곤 했다.
때때로 명옥은 그녀가 오는 낌새에 집안에 있으면서도 현관문을 잠그고 없는 척 하기도 했다. 아니면 외출할 계획도 없다가 마당에서 그녀와 마주치거나 방심한 사이에 잠그지 않은 현관문을 밀고 그녀가 들어서거나 할 때면, 갑자기 지갑과 열쇠를 꺼내들고 외출해야 한다며 구실을 급조하기도 했다.
명옥이나 마을사람들이나 모두 그녀를 벌레처럼 털어 내는 이유중의 하나가 한번 그녀를 집안으로 들이면 끈덕지게 엉덩이를 붙이고 가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관대하거나 측은지심을 가지면 그녀는 그것을 이용해 밤늦도록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하려 들었다.
더구나 그녀가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하려는 사이, 그녀의 아이는 남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아 그녀와 아이에게 조금 남아 있던 연민마저 사라지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한 두 번 그들을 겪게 되면서 모두 넌더리를 내고는 그들 모녀에게서 돌아섰다.
명옥도 어쩔 수 없이 몇 번 그들 모녀를 집안으로 들였다가 끈덕지게 엉겨 붙어서 명옥의 남편이 퇴근해 오고도 갈 줄 모르는 그들 모녀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차마 그녀들도 인간이기에 명옥은 자기 스스로 가겠다고 돌아서지 않는 그녀들을 내보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을 만큼 관대하지도 못해 저녁때를 넘기면서 까지 그녀가 어서 가주기만 바라고 있던 적도 있었다. 마침 그녀와 친척간인 이웃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아이의 소리를 듣고 명옥의 집에 들어와 대신 내쫓아 주어서야 명옥 부부는 겨우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년을 내쫓아도 아무도 나무랄 사람 없으니까 들어오면 막 가라고 몰아요. 시도 때도 모르고 아무데나 엉덩이를 누르고 있으니 그런 걸 사람이라고…. 아유 개만도 못해.”
자신이 큰 피해라도 받은 듯 씩씩거리며 그녀를 명옥 대신 집밖으로 끌어 내준 이웃은 명옥에게 그녀를 들이지 말라고 당부 아닌 당부를 했다. 명옥은 난처한 일을 해결해 준 이웃이 고맙기도 하지만 그렇게 쫓겨나야 하는 그녀의 처지에 또 가슴이 싸하는 통증을 느껴야 했다.
이웃은 그녀가 아이를 잡으러 왔다고 변명하자 그녀에게 아이를 개줄로 집안에 묶어 놓으라고 야단스럽게 소리쳤다.
그 뒤에도 명옥이 그녀를 볼 때면, 잔치든 회식이든 동네에서 먹는 판이 벌어지는 곳이면 불청객인 처지에도 어김없이 아이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아무도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먹이 앞에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수가 없는 그녀는 눈치를 살피며 한쪽 귀퉁이를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바닥에 따로 놓여진 밥을 받으면서 그들 모녀는 그들 스스로도 얼마만큼 먹었는지 모를 만큼 계속해서 먹어대는 통에 꼭 무슨 일을 저지르거나 당해서야 그곳에서 물러나기 일 수였다.
한번은 세숫대야만큼이나 많은 밥을 그녀가 자신은 물론 아이에게 밀어 넣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토해버린 적도 있었다. 그 장면을 본 동네사람들은 모두 구역질을 했다. 그 날도 그녀는 동네사람들에게 욕을 잔뜩 얻어먹고서야 그 자리를 떴다.
또 한번은 눈치도 없이 그녀가 옆에 오는 것조차 싫어하는 동네 사람 집에 사람들과 어울려 있다가 등에 업은 아이가 그 집 카페트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아, 아이는 그녀 등에 업힌 채 사람들에게 태질을 당했다. 여기에 가세해 어떤 이는 라이터를 켜서 그 아이를 지져버리겠다고 위협하며 그 모녀 가까이에 불을 갖다 대기도 했다. 그녀는 동네에서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