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대표시 10편
보랏빛 남쪽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싱싱한 초록이다
보랏빛 남쪽
하늘을 끌어다 토란잎에 앉은
청개구리
한 소쿠리 감자를 쪄 내온
아내 곁에
졸음이 나비처럼 곱다.
산수유꽃 피기 전
산수유꽃 피기 전
해야 할 일 못 다한 것이
바람 속에 왜 이제사 생각나는지
아프다
아픔을 견디다 견디다
혼자 눈떠보는 밤이 있다
어떤 나무의 죽은 가지에
새 속잎이 돋는 걸까
아프게 아프게
연초록의 어린 사랑이 피어나는 걸까
오래 잊었던 일
새록새록 죄 다짐으로 살아나서
아픔의 잎잎이
내 안에서 돋아난다
사금파리처럼
때로는 붉은 번개로
창자를 긋는 밤이 있어
눈뜨는 홑겹의 외로움이 슬프다.
봄 회상
찻물을 끓이며 생각느니
그리움도 한 스무 해쯤
까맣게 접었다가 다시 꺼내 보면
향 맑은 솔빛으로 내 안에서 우러날거나
멀리서 아주 멀리서 바라보기엔
천지에 봄빛이 너무 부신 날
이마에 손가리갤 얹고
속마음으로만 가늠했거니
보이는 듯 마는 듯
묏등을 넘어 푸르릉푸르릉
금실을 풀며 꾀꼬리가 날아간 하늘
누님의 과수원에
능금꽃 피던 날이었을거나
능금꽃 지던 날이었을거나.
호박꽃 속에 갇힌 벌
무슨 일인지 모른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숨을 쉬고
밥을 먹었다 주말이면
알 수 없는 기류 일단이 만삭이 되어
무등경기장 일대와 지산동 부근에서만
비를 풀었다
베란다에 나가 보면
완강하게 시야를 차단하는 맨션아파트의 허리가
늘 눈썹 위에 있었다
주말마다
검은 색안경을 끼고 티브이 속에서
씨나락 까먹는 귀신들
엠비시에서 케이비에스에서
이쪽에서 저쪽까지 모조리
점령해버렸는데 새벽의 계엄군처럼
아 나는
이 여름에 부르고 싶은 노래가 없다
올라가서 옥상에서 하늘로 까마득히
올라가서 카스트라토*로 까무러치게
부르고 싶은 노래가 없어서
투항한다 환멸이여
살려다오
내게는 무기가 없다
* 카스트라토 : 16~19세기 이탈리아에서 노래하던, 변성기 전에 거세된 남성 소프라노 가수.
금강굴 가는 길
신록이 향기로웠다
비선대의 너럭바위에 토끼처럼 앉아
시린 여울에 발을 씻고 나선 길
엎어지고 포개진
바윗돌을 톺아 가는데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굽이에서
아내는 자꾸만 뒤에 처진다
계면쩍은 은혼의 여행길
느지막한 오후 참에
금강굴로 오르는 길
돌아보지 마, 돌아보지 마
늙은 느티나무의 작은 구멍을 향해
발밤발밤 기어오르는
불쌍한 개미들처럼
여보, 차라리 애기 하나
더 낳는 게 낫지
못 올라가겠어요
힘들고 가파른 길이
어디 금강굴 가는 길뿐이랴 싶어
숨찬 아내의 손을 잡아주는데
아내의 살쩍머리
저 아래 비선대 흰 물소리가
한두 올 슬펐다
금강굴 예까지 오는데
이십오 년이라니.
건너편의 풍경
내 눈 높이로 걸려 있는 나지막한 허공
능선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의 생각이 환하다
이 겨울엔 산도 생각이 맑아져
저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로 흐르는구나
고집스레 무성하던 초록의 의상을
가을 한철 다 벗어버리고
메마른 가지와 가지 사이로
홀연히 건너편의 풍경을 열어주는 나무들
달리는 차창 안의 나에게.
물소리가 그대를 부를 때
엊그제가 입동(立冬)이던가
코트 깃을 세우며 퇴근하는 길
가까운 데서 물소리가 나를 불렀다
이상하여라 골짜기도 보이지 않는데
누가 나를 부르는 걸까
고개 돌려 바라보니
눈부신 노란 은행나무 곁
은사시나무가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잊고 지내었구나
뿌리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한 줄기의 은빛 그리움이 스스로 깊어져서
바람에 볼 비비며
잎새마다 부서져 물소리를 내는 것을
내가 잊고 있던 부끄러운 사랑도
뿌리 깊이 묻혀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그대가 무심히 내다보는 유리창에
물소리로 물소리로 흐를 것인가.
풍란
벼랑 끝 바윗돌에 붙어 꿈꾸다가
내려다보는 저 아래에는
물새 울음 한 점 흐르지 않고
붉은 산호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가 없으므로
나는 비명도 못 지른다
검푸른 바위옷이 발치에서 말라간다
이 밤에
나는 위험하다
벌거벗은 뿌리에 본드를 칠하고
매끈한 먹빛 수석 위에 결박당해
붙어 있다 십자가의 예수처럼
수반 위 세 치 높이에서
한 줌 물안개도 피지 않는 허공이
천 길 벼랑인 것을
차라리 나에게
목숨을 날릴 태풍을 다오
뛰어내릴 쪽빛 바다를 다오.
물 속 풍경
깊은숨 들이마신 다음
물 속으로 자맥질해 보았지
눈 부릅뜨고 물 속 풍경을 보았지
자갈을 간질이는 모래무지
꼬리지느러미로 사알살
물살에 모래를 끼얹는 것을
냇물 속으로 참방참방 뛰어들어오는
열다섯 살 빗살무늬 햇살
자잘한 각시붕어와 피라미들이
내 새끼발가락을 깨물다가 환한 햇살을
뽀글뽀글 받아 읽는 소리 들렸지
자갈과 자갈을 두 손으로 맞부딪치면
꿈결인 듯 울리는
은은한 목탁 소리
햇빛이 물 속에서 허리를 꺾듯이
소리도 물 속에서 키를 낮추어
물길 따라 실타래로 흘러가고 있었지.
모쿠슈라
어디로 갈까, 가야 하나
붉은 사막을 맨발로 건너가는 달을 보았다
배스킨라빈스의 나이 서른 하나가 너무 늦은 거라면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너는 내게 말했다
언제고 그렇다 너무 늦은 건 아니다
죽음이 내일 생각지 않은 쓰나미 속에 묻어올지라도
오늘은 늦은 게 아니지
창 밖으로 흰눈을 내다보는 키 작은 백량금은
알알이 붉은 열매를 매달고
겨울 건너 봄 한철을 또 견디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지
문제는 상처다
뼈에 가까운 상처는 지혈이 어려워
그런 상처만 아니라면
저 붉은 사막을 나는 걸어갈 수 있겠다
낙타가 없어도
내가 낙타가 되어서 가야 하지 않겠느냐
모쿠슈라
회오리바람 치솟는 어둑한 하늘 아래
우리가 만난 것은 뜻밖의 행운이고 기쁨이었다
저 붉은 사막에 걸쳐지는 검은 그림자를
네가 보는 거기는
어디냐, 물결 소리 낮아서 평화로운 거기는.
* 모쿠슈라 : 게일어로 '나의 소중한 혈육'이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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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프로필
1944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본명은 동길.
전주고등학교, 전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196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신 앞에서」가작 입선.
1966년 9월 현대시학(김광림 주간)에 「귓밥 파기」신인작품 추천.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당선.
1967년 5월 공보부 신인예술상에 시조 「임진강」수석 당선.
신춘시, 목요시, 원탁시 동인.
1966년 3월 ~ 2004년 2월까지, 정읍 호남고등학교와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명예퇴직.
시집
『異常氣候』(1966 가림출판사)
『불꽃』(1974 대흥출판사)
『全羅道詩人』(1982 태멘기획)
『우리나라 날씨』(1986 나남출판사)
『칼레의 시민들』(1992 문학세계사)
『황홀한 물살』(1999 창비)
『푸른 심연』(2005 고요아침)
시선집
『어린 신에게』(1998 문학동네)
시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2003년 시와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