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개 산 사(1)
박 정 은
다솔밭을 휘감은 안개로 사물들이 빛깔을 잃고 소리마저 침식당한 듯 무지근한 정적이 흘렀다.
솔가지마다 안개 알갱이가 눈꽃처럼 피어났다. 샛길을 벗어나 구릉에 올라선 여자는 흑갈색 털목도리를 턱 아래로 밀어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구릉 아래는 다솔밭으로 온통 휘돌아서 침전된 안개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몰려있다. 여자는 구릉 아래로 비척비척 내려가더니 이내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침묵이 흘렀다.
법당에서 주지의 목탁소리가 그치자, 산사(山寺)는 안개에 묻혀 침묵이었다. 요사채의 아궁이에서는 마른 솔가지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꽃을 일으켰다.
여자는 웅크리고 앉아서 아궁이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불꽃이 일어나 여자의 얼굴을 환하게 밝힐 때 그렁그렁 맺힌 물기가 눈가에서 반짝였다.
주지도 행자도 아직 법당에서 나오지 않았다. 요사채 건너편에서 파르스름한 머리의 젊은 승려가 승방문을 밀고 나와 여자를 보았다. 선명한 눈빛이 맑은 유리처럼 빛났다.
“ 오셨습니까. ”
짤막한 인사말로 손을 모아 합장을 한 그는 조용히 웃으며 섬돌 아래로 내려섯다. 내려서서 여자에게로 가는 동안 회색 승복에 안개가 내려앉았다. 차츰 내려가는 기온으로 안개는 서리 같은 색깔을 갖게 갖게 된 것이다.
“ 오래만 입니다, 스님. ”
여자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앞 머리칼에 하얖게 엉겨붙은 얼음 알갱이가 이슬이 되어 불꽃 속에 떨어졌다. 한동안 불길 속에서 물방울이 튀는 모양을 지켜보다가 그가 올라서는 부엌 옆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마주 본 젊은 승려와 여자는 물이 끓어오르는 풍로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끓어오르는 찻물을 풍로에서 내리는 승려의 조용한 동작을 여자는 향수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승려는 찻잔을 우린 후, 비취색 찻잔에 찻물을 조금씩 부어 나뭇잎 모양의 받침대 위에 올려 놓았다. 여자는 찻잔을 받쳐들고 한 모금씩 조심스레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여자는 파르스름한 승려의 이마와 그 위에 걸린 달마도를 그윽히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여자는 다시 그 눈길로 승려를 보았다.
“ 스님, 차 빛깔이 참 고와졌군요. ”
아직도 여자의 눈에는 물기가 가시지 않았다. 머리칼도 젖어 있었고 창백한 낯빛에도 축축한 습기가 베어 있었다.
“ 예, 고맙습니다. ”
젊은 승려는 미간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깍듯한 답례를 주고받은 여자와 젊은 승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차를 마셨다. 마치 차 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찻물을 들여다 보았다가 차를 마시는 일을 반복하던 승려는 여자의 눈가에 자꾸만 어리는 물기를 보면서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난을 치시겠습니까 ? ”
어색한 침묵을 깨고 젊은 승려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준비해 오지 않았습니다만....”
젊은 승려는 여자의 대답도 다 듣지 않고 요사채를 나가 그가 거처하는 승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승방을 나온 그의 품안에는 화선지 한 꾸러미와 붓다발이 들어 있었다.
“자아, 먹을 가십시오.”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화선지를 펼치고 벼루에 물을 부어 여자에게 먹을 갈게 했다. 여자는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먹을 둥글게 갈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굳힌 그는 여자의 손놀림이 흔들릴 때마다 시선을 먼 곳에 두고 이를 무심히 흘러버리려 노력했다.
서걱서걱 먹을 가는 소리만이 방안에 흘렀다. 시간의 흐름은 정지된 채 먹 가는 소리만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여자는 먹을 갈며 주지와 행자의 염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느리고도 구슬픈 가락이 목탁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색불 이공 공불 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
얼핏 귀에 잡히는 두 어귀를 되 뇌이며 여자는 마음을 모으려고 애를 썻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 젊은 승려도 마음속으로 두 어귀의 의미를 생각하며 여자의 핼쓱한 손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담담하게 모든 이치를 살피고 마음에 일어난 번뇌 따위는 모두 한 순간의 파도와 같은 것임을 느끼며 지금 이 순간의 몸과 마음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주지는 잔설이 군데군데 얽힌 노송의 등걸을 눈부시게 바라보았다. 안개가 한 켠 밀려났는데도 반쯤 줄어든 노송의 키는 자랄 줄 몰랐다. 주지가 노송의 등걸을 어루만질 때 행자가 허리를 굽혀 다가왔다. 아직 소년 티를 벗어나지 못한 행자는 코를 씰룩이며 주지 가까이 섰다. 무슨 일인가 무척 망설이는 눈치였다. 주지는 뒷짐을 지고 낙엽송이 수북하게 쌓인 다솔밭을 거닐었다.
“ 그래, 별 말들은 없더냐? ”
주지의 머리에서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짧게 도드라져 보였다.
“ 예에, 혜원 스님께선 바위처럼 계시고요 , 보련화는 그저 먹만 갈고 계십니다. ”
행자는 자신이 들어오기 전에 이곳에 있었던 혜원이 낯 선 모양이었다. 그리고 친 누님같이 따르던 보련화가 아침 안개 속을 달려와 혜원과 함께 난을 치는 것이 매우 궁금한 듯 하였다. 주지는 행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낮게 깔린 운층이 나무 끝으로 내려와 있었다. 안개가 차의 훈향처럼 고르게 퍼진 솔밭에서 뒷짐을 지고 가사장삼을 끄는 주지와 그 뒤를 주춤주춤 따르는 행자의 발자국 소리만이 산내를 울렸다.
“ 주지 스님 , 보련화는 언제부터 난을 치기 시작했습니까 ? ”
주지는 보련화가 암자에 왔을 때를 가늠해 보기 위해 가지 끝에 떨어지는 눈더미에 시선을 모았다.
“ 한 사 오 년 전쯤일세. ”
사 오 년 전, 보련화가 주지를 찾아 왔을 때도 안개가 며칠 내내 산사를 휘감았었다. 속세의 촌수로 따지면 주지는 보련화의 외삼촌이었다. 피폐한 모습으로 잠시 쉬려고 찾아온 보련화를 주지는 말없이 받아 주었다. 보련화는 며칠 내내 방안에 틀어 박혀 나오지 않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주지는 걱정스런 눈길로 보련화가 묵는 방을 건너다보았다. 그 때 마침 혜원이 객승으로 잠시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에게 보련화를 의탁하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이런 일에는 가까운 피붙이보다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남이 더 나은 법이라 생각했다.
객승인 혜원을 붙잡아두고 보련화의 상처 난 마음을 아물어 주도록 부탁하게 되었다. 보련화는 혜원에게 법문을 듣고 사군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 동양화에 관심이 많았던 보련화는 이내 혜원의 선화에 이끌리어 사군자를 익혀 나갔다. 그 중에서 그녀는 난을 치는 것을 가장 좋아하였다.
“ 그러면, 스님. 혜원 스님께서는 언제 떠나셨다가 돌아오신 겁니까. ”
“ 글쎄, 음력으로 삼 년 전 시월이었던가... ”
주지는 지난 날 동안거 결제식에 이르기까지의 혜원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거의 파계 상태에까지 이르렀던 혜원이 일자 글월도 없이 사라진 때는 삼 년 전 시월 보름 경이었다. 초겨울의 찬바람이 휭 휭 산사를 감는 매서운 날씨였다. 혜원의 방에는 붓도 벼루도 그대로였고 입고 있는 누더기 옷 채로 사라진 거였다. 방 한 가운데에는 채 마르지 않은 달마도가 놓여 있었다.
“ 스님, 솔가지를 긁어 점심 공양을 지어야겠습니다. ”
행자는 주지의 사념을 깨며 솔밭 수북히 쌓ㅎ은 솔잎과 삯다리 가지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예전 주지 때부터 다솔밭의 관솔로 점심 공양을 짓는 의식을 수행의 한 가지로 지금 까지 그대로 따라했다. 암자가 생긴 지는 백 여 년이 넘었건만 그 방식은 이 곳 객승으로 머물던 주지가 평생을 붙박이로 살아 온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행자가 땔감을 모으는 동안 주지는 암자의 지붕 끝에 눈을 맞추고 염주를 한 알씩 굴려나갔다. 싸각싸각 관솔 긁는 소리가 울리고 여트막한 안개의 막을 통해 멀리 요사채의 아궁이에서 사그러지는 불꽃을 보았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주지의 눈썹에도 장삼에도 하얀 알갱이가 맺혔다.
“ 예야, 이만 들어 가자구나. 얼른 점심을 지어야 제때에 공양을 들겠다. ”
주지는 행자를 불러 나무짐을 묶는 손길을 재촉했다.
“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스님, 겨울에는 점심이 너무 이른 듯 합니다. 물론 아침에도 그렇고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