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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박정은)/단편소설(박정은) novel

안개산사(2)

 안개산사(2)

 

 

 

 

 

행자는 사시사철 똑같은 시간에 세 끼의 공양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한 여름이라면 몰라도 겨울에는 아침을 여섯 시에 들고 정오에 점심, 오후 여섯 시에 저녁을 드는 규칙적인 생활이 매우 힘든 눈치였다.

“ 네가 무척 어려운 모양 이다만, 비단 불가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그 시간에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게 되면 정신이나 신체 모두 건강해지는 범이지, 예부터 내려오는 불가의 생활들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오듯,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에서 생명을 싹틔우고, 다시 올라간 수증기가 구름이 되어 하늘의 비가 되는 대자연의 이치처럼 인체의 생체리듬에 그대로 따른 것이지.”

주지는 암자의 전통과 불가의 법도를 행자에게 자상하게 설명하며 다솔밭을 내려갔다. 그리고 행자가 들어가는 요사채로 느릿느릿 뒤따라 들어갔다. 전에 있던 공양주가 연로해져 도시의 큰아들이 모셔간 후, 갑자기 절의 안살림을 맡게 된 행자가 어떻게 해 나가는 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나어린 탓에 처음에는 아주 힘들어 했으나 그런 대로 잘 하고 있어서 이제는 가끔씩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였다.

행자가 가마솥에 쌀을 안치고 나무짐을 풀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주지는 이를 지켜보다가 잠시 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안에서는 아직도 먹 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부비는 요사채를 나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뜨락을 거닐다가 법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법당문을 말고 들어간 주지는 가운데 부처인 비로자나불 앞에 정성껏 삼배를 올리고 난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염주를 돌렸다. 혜원과 보련화를 위한 기도를 올리며 보련화의 지난 모습을 떠올렸다.


보련화가 암자에 머무른지 두 세 달이 흐른 뒤였다. 밤새도록 법당 안에서 날을 밝힌 보련화는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이끌고 주지를 찾아왔다.

“스님, 증오도 어쩌면 사랑의 한 모습이었나 봅니다. 마음속에서 증오의 감정을 없애니 그 밑바닥에 숨어 있던 한 울의 사랑마저 사라지고 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는 보련화의 표정은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평생토록이라도 끌고 다닐 것 같은 실연의 질곡 속에서 헤어 나온 보련화가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이 모두 혜원의 덕이라 여겨졌다.

주지가 혜원에게 그 고마움을 치하하고 안심하고 있을 때 보려화가 다시 주지를 찾아왔다.

“그런데, 스님. 왜 이렇게 가슴속이 텅 빈 것 같을 까요. 아무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구멍이 가슴 한 견에 자리한 듯하니 말 이예요…. 아무런 의욕이 없어졌습니다. 살고픈 의욕도 그렇다고 죽고픈 의욕도요.”

기쁨도 잠시, 보련화는 이제 또 다른 병을 얻게 된 것이다. 주지는 더욱 난감해져 보련화를 달래어 보았지만 이번에도 혜원에게 그 처방을 기대했다.

보련화에 관하여는 모든 것을 혜원에게 맡기고 자신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모르는 체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혜원은 어린하이 살갗처럼 맑고 고운 미간을 잠깐 찌푸렸다. 어렸을 때, 불가에 들어 온 그의 품성은 속세의 잡다한 번뇌를 모르는 채로 깨끗하고 단정하기만 했다.

“그 것은 지금껏 보련화가 자기 본성을 떠나 허상을 바라보며 살았던 탓입니다. 부디 자기 본성을 바라보십시오. 자신 속에서 철저히 살아가십시오. 자기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밖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속에 고요만이 흐르지요. 바다에 풍랑이 일거나 파도가 쳐도 바다는 여전히 바다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혜원은 보련화의 빈자리에 마음의 기둥을 세우고 부처님을 향한 신심으로 더욱 마음밭을 단단히 하는 것만이 마음의 병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담담히 결론지었다.

그 다음날 새벽, 혜원이 세시 반에 일어나 도량을 들고 법당에 들어가니 뜬눈으로 날을 세운 보련화가 촛불을 밝히고 부처님 앞에 끊임없이 절을 올리고 있었다. 주지와 혜원은 내심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백팔번뇌으 l종을 울린 다음, 목탁과 함께 청법예불을 시작했다.

법상 위로 타오르는 향불 내음이 법당 안을 충족하게 번져 나갔다.

의식이 끝나고 법당문을 나서는 혜원은 싶은 감동을 받고 난 뒤의 헛헛한 눈으로 보련화의 이마를 보았다. 속세의 아픔을 그저 환상처럼 건너짚었던 혜원에게 보련화를 가까이 지켜보게 됨은 그것이 단순하고 작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아님을 깨닫게 했다.

막연하게 추측되는 보련화의 아픔은 실연인 것 같았다. 흔하디 흔한 사랑의 기쁨이 깨어지고 한 자락 상대에 미련이 다시 미움으로 자라나는 인간 사이의 애련이 혜원에게는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중생들의 야트막한 생채기쯤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보련화의 시련을 가까이서 지켜본 혜원은 자신의 단정이 얼마나 도식적인 생각인지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안개는 흐린 구름 밑에 산사를 침식시키고 있었다.

행자가 주지를 불러 모시고 점심공양을 시작하려 할 때 보련화는 난의 첫째 잎을 연습한 화선지를 잔뜩 쌓아놓고 있었다. 한 잎 한 잎 그릴 때마다 여러 번 연습을 한 뒤, 그리려는 화선지에 마지막으로 그려 넣는 방식은 혜원의 방식이었다.

수저와 젓가락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낼 뿐, 점심 공양을 다 끝내도록 넷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서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조용히 식사를 마칠 동안 행자만이 흘끔거리며 공양간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점심 공양을 끝내고 혜원이 차를 우리는 동안 주지는 드문드문 보련화에게 집안 소식을 물었다. 보련화는 주지가 물어오는 질문에 힘없이 응답하였다. 주지는 보련화의 혼기와 그녀 홀어머니의 건강을 결부시켜 질문을 계속했다. 보련화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을 채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속세를 떠나온 지 사십년이 넘은 주지였지만, 세상에 단 한 분밖에 없는 누님인지라 말년을 근심 없이 살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요즈음 누님의 근심은 모두 보련화에게 있음이 자명하므로 혹여 혜원에 대한 마음이 되살아 날 가봐 걱정 되었다. 또 가까스로 마음을 잡고 정진하고 있는 혜원이 다시 흔들리게 되는 것도 두려운 까닭이다. 주지는 두 사람 모두에게 일침을 놓으려는 뜻에서 보련화의 혼사를 화제에 올렸다. 행자는 이런 주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보련화가 곧 결혼 날짜라도 잡는 양 기쁜 표정이었다.

“보련화 누님, 시집가시면 제게도 꼭 기별해야 합니다. 그보다 먼저 누님 신랑감을 소개시켜 주셔야 하고요.”

행자의 그 말에 보련화는 그 동안 억제하고 있던 슬픈 감정이 솟구쳐 눈물을 훔쳤다.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숨죽이며 우는 보련화의 등을 보고 주지는 착잡한 마음으로 행자를 데리고 다시 법당 쪽으로 나갔다.

주지와 행자가 법당으로 간 뒤에 혜원과 보련화는 다시 난을 쳐갔다.

첫째 난 잎은 중앙 조금 왼쪽 밑에서 치우쳐서 오른쪽을 향해 화선지를 전부 채울 듯 부드럽게 그었다.

“대가 부드러움을 얻은 대신 힘을 갖지 못했습니다. 첫째 잎은 기운이 살아 움직이듯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일필 기운생동(一筆 氣運生動)

혜원은 보련화가 첫째 난 잎을 치기 시작하자 자세를 꼿꼿이 한 채 난의 특징을 설명했다.

“난은 누구나 쉽게 그 모양새를 익히나 난의 참된 모습을 익히기는 매우 어렵지요.”

가부좌를 튼 혜원 앞에서 무릎을 꿇은 보련화는 먹을 갈고 붓 심자를 부드럽게 고추 세워 다시 난을 쳤다. 첫째 잎을 힘차게 친 후, 두 번째 잎은 첫째 잎의 밑 둥 왼쪽 옆에서 시작해 첫째 잎의 3분의 2가 되는 중간 위 부분을 가로질러 활 등처럼 휘어지게 쳤다. 창공을 향한 첫 째 난 잎과는 달리 부드럽게 땅을 향하여 내려갔다.

“두 번째 난 잎은 첫째 난 입과 마치 봉황의 눈을 그리듯 어우러져야 합니다. 첫 째 잎 보다는 조금 길게, 하지만 너무 길어도 안되지요.”

이필 봉안(二筆 鳳眼)

세 번째 난 잎은 첫 잎의 뿌리 쪽에서 시작해 첫째 잎과 둘째 난 잎 사이의 공간을 지나 반대쪽으로 그었다.

“세 번째 잎은 부드럽게 휘어지면서도 일어서면 곧 튕겨 질 듯 힘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 잎의 강한 기운과 두 번째 잎의 부드러움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면서도 그 것들을 깨뜨려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조용한 균형에 변화를 주어야지요.”

삼필 파봉안(三筆 波鳳眼)

혜원의 가르침이 많아짐에 따라 보련화 앞에는 더욱 많은 화선지가 쌓여 갔다. 혜원은 조용히 자신의 지시대로 따르는 보련화의 이마를 지그시 건너다보았다. 냉정한 자신의 채도에 말없이 순응하는 보련화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혜원은 되도록이면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세 째 잎은 두 잎 중 어느 한 잎에 끝이 붙게 그려 세 잎이 서로 떨어진 느낌이 안 들게 해야 합니다. 봉황새의 눈 정중앙을 피해서 한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잎의 두 잎과 균형을 이루도록 반대방향으로 그어야 하지요.”

혜원은 마악 세 번째 난 잎을 완성하고 있는 보련화의 가녀린 손등을 보았다.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번뇌가 안타까웠다. 지금 보련화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사람은 바로 혜원 자신임을 생각할 때 혜원 또한 마음의 갈피를 잃어버릴 듯 심란하였다. 그러나 혜원은 그럴 수록 마음과 몸을 더욱 굳혀 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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