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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박정은)/단편소설(박정은) novel

안개산사(4)

 

                                안개산사(4)

 

                             

 

                                 

 

 

혜원의 선화는 규칙적인 수행에서 어긋날수록 차츰 색깔이 화려해졌다. 관세음 보살상이라고 그린 불화를 보고 주지를 헛기침을 했다. 벌거벗은 여자가 풍만한 젖가슴을 팔로 살짝 가리고 엎드려서 긴 머리채를 흩뜨리고 있었다. 한 쪽 다리를 길게 뻗어 마치 벗은 몸을 살짝 돌리면 앞면이 드러날 것 같은 선정적인 나부상이었다.

그동안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수도에 정진하던 혜원이 속세의 남자처럼 여자의 살내음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주지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기로 했다.

어릴 적 불심 깊은 어머니에게 업혀 들어 왔다는 혜원이 너무 속세를 모르고 산 속에서만 살아와서 인간 세상의 번뇌가 무엇인지 그러한 갈등을 겪어 보는 것도 좋은 수행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주지 자신도 한 때 세속적인 욕망과 성불에 대한 좌절감으로 심하게 흔들렸던 젊은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오히려 그런 경험은 주지의 수행정진을 평생 도와주었다.

보련화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불경과 난에 심취되어 갔다. 휴학을 했던 학교에 다시 등록을 하고 휴일이나 강의가 없는 날이면 하루나 이틀쯤 산사에 묵고 가는 손님이 되었다. 올 때마다 생기가 돋아 있었고 명랑한 웃음으로 조용한 산사 마당을 울렸다. 자연림이 어우러진 절 구석구석에서 아름다운 꽃과 풀을 발견할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예전의 보련화 모습을 되찾아가는 징조였다.

가끔 혜원에게 농을 걸고 어리광을 피웠다. 이를 보는 주지는 마음이 아팟다. 긴 밤에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날을 꼬박 세운 것을 알기 때문에 혜원이 어죽어죽 웃는 모양새에 더욱 그러했다. 보련화는 혜원의 까칠한 턱을 보고는 그림에 몰두하는 정열이 부럽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기도 했다.

“스님의 그림은 점점 차원을 넘어서는 것 같아요. 여자의 누드화 같은 보살상들은 언뜻 보면 세속화 같기도 한데 사실은 그런 인습을 넘어선 높은 경제로 여겨지거든요. 한마디로 수도자의 여과과정을 통하지 않는 한 오를 수 없는 경지이지요.”

그 말에 혜원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땅을 주시했다. 까들까들 귀엽게 웃는 보련화를 당장 안고 싶은 충동과 함께 지금 치 닿고 있는 자신의 세계에 대한 환멸감으로 보련화를 바로 볼 수 없었다. 자신이 치 닿고있는 세계는 인습을 타파한 높은 경지가 아니고 발악이었던 것이다. 보련화와 부딪칠 때 느끼던 부끄러움도 잠시였다. 혜원은 이제 전처럼 수행에 전념할 수 없었다. 한 번 고장난 기계는 쉽게 망가지고 마는 것처럼 삐뚤어진 마음이 순간순간 느끼는 부끄러움으로 다시 돌아서기는 어려웠다.

얼마 후, 주지는 혜원에게서 술내를 맡았다. 꺼억꺼억 토하는 소리가 어두운 암자마당 한 구석에서 들려왔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새벽이슬을 밟고 돌아오는 혜원을 여러 번 목격할 수 있었다. 공양주 보살은 그런 혜원을 비웃고 업신여겼다. 예순이 넘은 그녀가 아들 같은 혜원에게 목을 조아리고 찻물을 날랐던 예전의 존경심을 버리고 나중에는 밥상 위에 혜원의 수저와 젓가락을 놓지 않았다. 심성이 억척스런 여인네였으므로 뚝심도 대단해서 주지의 호통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여인네의 경멸을 받으면서도 혜원은 노골적으로 폭음을 하였고 주정을 하기도 하였다. 주지에게도 자신의 파경을 못 본 체하는 태도가 위선이라고 삿대질하였다.

그럴 때면 공양주 보살은 부엌바닥에 놓아주던 상마저 차리지 않고 혜원을 모르는 체 했다. 스님이라는 경칭도 아예 생략하고 땡땡이 중놈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보련화는 혜원이 타락의 나래로 빠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 했다. 차츰 학교생활에 만족하여가므로 어두운 과거가 묻어있는 암자에는 차츰 발길이 뜬해져 갔다.

한 동안 발 길이 뜸하게 이어지던 보련화가 여름방학을 맞아 밝은 효정으로 산사에 놀러왔다가 화선지들이 뒤엉클어져 있는 혜원의 방을 보게 되었다. 그때 보련화는 혜원이 잠시 수행에 벽을 느껴 좌절하고 있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지나쳤다. 그리고 몇 번을 암자에 들렀다가 혜원과 주지의 실랑이를 목격하게 되었다.

어느 날 보련화가 외삼촌이라는 속세의 호칭을 부르며 주지를 찾아왔다. 주지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보련화가 혜원에 대해 아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 혜원 스님이 걱정스러워요. 처음엔 가볍게 잠시 갈등하고 있겠거니 여겼는데 공양주 말을 들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어떻게 스님의 마음을 잡아드릴 방도가 없을까요. ”

주지는 잠잠히 듣고만 있었다. 이런 주지가 답답하다는 듯 보련화가 원망스럽게 바라보아도 주지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참만에 입을 연 주지는 다만 막연한 말을 하였을 뿐이었다.

“ 보련화야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다 터득한 부처님도 한 갓 미물의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을 어찌 움직이겠느냐. 다 제가 스스로 터득해서 제 마음을 일으켜 가는 길밖에 없는데 별일 있을라구.”

보련화는 주지의 태도에 자신의 근심이 지나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안심하며 돌아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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